청담큰스님의 금강경

신통은 반야가 아니다.

如明 2016. 1. 21. 07:50

신통은 반야가 아니다.

이 반야바라밀은 말도 아니고 생각도 아니고 이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그야말로 절대(絶對)도 아니며 말로 할 수도 없고 생각을 어떻게 붙일 수 없는 실재(實在)입니다. 그런걸 어떻게 바라밀이라고 이름지을 수 있습니까? 생각하면 벌써 바라밀이 아니고 바라밀이란 생각이 있을 뿐 그것이 바라밀은 아닙니다. 그런데 또 이렇게만 생각하다보면 또 아무것도 아닌 걸로만 있는 것인가 보다 하는 데 떨어집니다.

그러니 이렇게 「바라밀이 무슨 바라밀이냐? 바라밀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하여 없다는 생각에 한편으로 치우쳐서 응무소주(應無所住)에만 집착하고 이생기심(而生其心)의 도리는 빠뜨리게 됩니다. 아무데도 주한 데 없는 것, 어떤 생각에도 이끌리지 않는 것 그것에만 치우치게 되므로 제일바라밀과 그것이 제일바라밀이 아닌 것과 두 개가 뭉친 것을 뜻하여 「제일바라밀을 설한 게 그게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니 그것이 제일바라밀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이 곧 파도고 파도가 곧 물이고 그런 뜻입니다. 중생들은 절대자성(絶對自性) 자리에서 듣지 않고 들으려 하여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분별심(分別心)으로 들으니까 허물이 생깁니다. ‘마음자리는 절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말 한다고 하면 말로만 더 구별하는 것이 됩니다. 「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해 놓고 보면 보통 문장으로 공부하는 사람이나 말로만 하는 사람은 깨치지는 못했지만 알기는 다 알았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이것도 실제로 비판해 보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할 때 이것은 한 번은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 말한 것이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다 내 버린 없는 거라고 한 번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는 말이고 보니 있는 거 한 번 생각해 보다가 없는 거 한 번 생각해 보다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이러는 거지 이것이 어째 실재의 면목(實在面目)을 생각하는 것입니까? 근사한 생각도 아닙니다. 그런 생각 내 버리고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고 들어야 합니다. 있는 게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고(言語道斷) 마음이 갈 곳이 없는 것, 곧 이것이 따져 볼 것 없이(心行處滅) 그렇게 듣는게 실체(實體)인데 그게 무어냐 하면 「반야바라밀이 제일바라밀」이다. 그게 근본이기 때문인데, 그렇지만 그게 또 바라밀이라고 할 수가 없는 내용이다 그러한 「바라밀이다.」 그러니까 아는 사람은 「바라밀이라」 해도 허물이 없고 「바라밀이 아니다」 해도 더 철저한 실재(實在)를 얘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바라밀이 아니기도 하고 바라밀이기도 하고 바라밀이라고 해도 괜찮고 바라밀이 아니라고 해도 허물이 없고 그런 바라밀입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지금 수보리 너하고 부처님 나하고 얘기하는 이대로가 실상이다, 중생하고 부처가 둘이 아니다. 이런거를 자꾸 얘기하는 이대로가 실상이다, 중생하고 부처가 둘이 아니다.」 이런 것을 자꾸 얘기하려고 하는 것이 금강경입니다.

소승불교가 염세주의(厭世主義)가 되어서 적멸(寂滅)만 자꾸 지키고 그것을 애착하고 인정도 모르고 없는 것만 애착하는데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한 번은 진묵(震黙)대사가 길을 가다가 강을 건너게 됐는데 얼굴이 참 예쁘게 생긴 사미동자(沙彌童子)가 나타났습니다. 애기 중이 나타나서 공손히 인사를 해서 「물이 깊어서 못가는데 어디로 가는지 길을 아느냐?」 물었더니 「소승만 따라 오십시오. 제가 이 물을 잘 압니다.」「그래 그러면 앞에 건너가 봐라.」하고 따라 갑니다. 앞에 가는 사미승을 보니 물이 무름 밖에 안 차서 껑충껑충 건너갑니다. 진묵대사도 안심하고 따라가는 데 갑자기 물이 목까지 쑥 빠져 버렸습니다. 그게 나한(羅漢)이 나와서 그런 것인데 진묵대사가 대승 불교의 진리를 깨쳐서 반야바라밀을 알고 있지마는 신통(神通)은 아직 나한만 못합니다. 그래서 대승 보살 한 번 골려 먹느라고 나한들이 그런 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진묵대사 같은 이는 나한님을 모셔 놓은 법당에 가서 주장자를 가지고 머리를 똑똑 두들기면서 「아무개는 자식이 없다는데 이거 마지밥(佛供) 얻어 먹고 자식 하나 점지해 줘라.」하는 그런 식입니다. 신통이 없고 이래도 법이 높으니까 그래도 나한들이 꼼짝 못하고 나한들은 큰 스님 명령이니 할 수 없다고 또 아들 하나 점지 해 주고 그럽니다. 이것이 대승사상(大乘思想)과 소승사상(小乘思想)의 비교하는 예입니다.

그러므로 말은 다르지만 「제일 바라밀이 즉비 제일바라밀 시명제일바라밀(第一波羅蜜 卽非第一波羅蜜 是名第一波羅蜜)」이라는 말이 내내 「실상자 즉시비상 시명실상(實相者 卽是非相 是名實相)」과 똑 같은 논법(論法)이고 내용도 같고 이름만 다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