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할양무심(塗割兩無心)의 인욕 가리왕은 본래 폭군인데 따뜻한 어느 봄날 대신 장군들을 이끌고 큰 산으로 사냥을 가게 됐습니다. 이날은 특별히 궁녀들도 따라 갔는데 산에서 놀다가 가리왕은 몸이 좀 피곤해서 잠이 들었습니다. 임금이 잠이 들면 궁녀들이 옆에 있다가 행여나 개미라도 기어 올라갈까 염려되어 모두 시위를 하고 있는 법인데, 이 날은 대신과 장수들도 많고 그러니 궁녀들 수십명이 산 구경하자고 임금 곁을 떠났습니다. 궁 안에만 갇혀 있다가 모처럼 산에 오라오니 여기저기 구경하다가 돼지 막처럼 지어 놓은 토굴(土窟)이 하나 있는 것이 눈에 띄어 그 안을 들여다 보니 사람이 하나 앉아 있는데 얼굴을 보니까 인간세상 사람은 아니고 백옥 같은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도사(道士)였습니다. 세상에서 욕심만 꽉 차고 심술이 꽉 차서 속된 욕심이 줄줄 흐르는 인간만 대하다가 욕심이 뚝 떨어진 신선(神仙)을 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범부 눈이라도 존경심(尊敬心)이 생겨서 「선생님,여기서 무얼 하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아무것도 하는 게 없다.」 「그러면 아무것도 하는 거 없이 무엇 때문에 여기 앉아 계십니까?」이렇게 문답을 하는데 그만 시간이 간 줄 모르고 한 시간이 넘었습니다. 그때 임금이 잠이 깨어 일어나서 궁녀들 수십명이 어디로 가고 없는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옛날에 나쁜 제왕(帝王)들이 시기 질투 많고 참 고약했습니다. 자존심만 많아 가지고 날 조금이라도 덜 좋아하는 눈치가 있는 여자 하나라도 있으면 당장 목숨이 달아나고 그렇게 지독합니다. 그런데 가리왕은 궁녀가 없어졌으니 그만 골이 잔뜩 나서, 여기 저기 찾다가 궁녀가 있는 곳으로 단 걸음에 달려와서 보니 조그만 초막 안에 거기 다 함께 들어가 있는데 극도의 시기심이 일어나 가지고 다짜고짜로 막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너희들 나 아닌 어떤 놈하고 얘기하느냐 싶어서 자세히 살펴 보니 얼굴이 그럴 듯 하게 잘 생긴 도인 남자하고 저희끼리만 앉아서 갖은 얘기 다 했을 것이라 생각해 보니까 당장 그 놈을 칼을 빼서 전부 목을 베어야 하겠지마는 거기까지는 너무 심한 것 같고 또 옷은 다 제대로 입고 있는 걸 보고는 훑어보기만 합니다. 궁녀들은 잠깐 한 십분 동안만 갔다 온다는 것이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그만 임금이 잠이 깨도록 있었으니 이젠 죽었다 싶어서 뜰아래 꿇어 엎드려서 대죄(待罪)를 합니다. 가리왕은 그 신선에게 「네가 이런 산중에서 혼자서 뭘하느냐?」 「아무것도 아니합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한다면 여기 무슨 재미로 있느냐? 사농공상(士農工商)에 뭐 하나 책임을 지든지 그렇지 않으면 산 중에 와서 도를 닦든지 뭐 하나 해야 할 것이 아니냐?」하며 이렇게 꼬집어 묻는데도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네가 아무것도 안 하느냐?」 이제 칼이 곧 빠지려고 하는 판인데 「제가 참는 공부를 좀 하고 있습니다.」 마지 못해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러면 네가 참는 공부를 했으면 잘 참느냐? 참는 거 몇 해나 공부했느냐?」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네가 어느 정도까지 참느냐?」 「참는 데까지 참습니다.」 극도로 노해 있는 국왕의 무서운 모습에도 아랑 곳 없이 냉정한 태도에 왕은 더 괘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네 신체를 도려 내도록까지 참겠느냐?」 「글쎄요, 참는 데까지 참지요.」 그러자 왕은 칼을 쑥 빼어 가지고 한쪽 눈을 푹 도려내 버렸습니다. 피가 툭 터졌는데도 신선은 가만히 남은 눈을 꼼짝도 안하고 앉아 있습니다. 이놈의 자식 항복도 안하고 이런 나쁜 놈이 있느냐고 또 한 눈을 마져 빼 버렸습니다. 그래도 아무 말도 안하고 찡그리지 않고 등상불 모양으로 그대로 앉아 있습니다. 가리왕은 참는 공부를 한다고 하더라도 임금의 말대접을 해서라고 항복을 해야 할 테인데 이 놈이 임금을 이기려고 한다고 더 화가 나서는 「네가 참는 데 까지 잘 참는다고 했으니 참아 봐라.」하고는 그만 양쪽 귀를 싹싹 오려 버립니다. 아, 그래도 선인은 까딱 안하고 앉아 있습니다. 양 볼을 다 베어서 서른 두 개 이빨이 다 나오게 했습니다. 그래도 신선은 아무 말도 안합니다. 요런 죽일 놈 보라고 두 팔을 짤라내고 두 다리를 짤라 내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몸뚱이 동체만 남았는데 그리고는 또 두 젖을 도려내고 그래도 선인은 까딱 안 하고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도리천(忉利天)하늘의 제석천(帝釋天)은 둘째 하늘의 천주(天主)인데 위에서 내려다 보니 가리왕의 소행이 하도 악해서 더 참을 수가 없어서 곧 내려와 가지고는 태풍을 일으켰습니다. 뇌성벽력을 하고 바윗돌이 갔다왔다 산이 막 무너지는 판입니다. 그래 훍이 수 백길씩 올라갔다 내려치고 하니 가리왕이 겁이 나서 「아, 천벌(天罰)이 내리는구나.」하고 꿇어 엎드려서 살려 달라고 빌고 대신들이고 궁녀들이고 돌에 묻혀 죽을 판입니다. 그런데 그 때 선인이 제석천에게 자기는 다 죽게 되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지만 말하기를 「오늘 내가 참는 이 인욕이 정말 인욕다운 인욕이거든 내 앞에 있는 가리왕을 해롭게 하지 마옵소서.」합니다. 이것이 참는다고 하는 생각이 조금도 없는 인욕 곧 참으려고 억지로 참는 게 아니고 인욕바라밀이 즉비 인욕바라밀입니다. 무심한 지경에 들어서서 하는 인욕입니다. 그러나 태풍이 싹 꺼지면서 앞에 참 거룩한 이가 하나 나타났는데 하늘에 옥황상제가 자기 본신(本身)을 그대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천동천녀(天童天女)를 함께 데리고 와서 무수한 절을 인욕선인에게 하면서 하늘에 전당포라는 신기한 약이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팔을 갖다 붙이고 눈도 제자리에 붙이고 귀도 약을 발라서 붙이고 그리고 나니 그게 본래대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천당에서 미리 준비했던 음식으로 천공(天供)을 올리고는 미래세(未來世)에 성불하시거든 부디 저 부터 먼저 제도해 달라고 간청을 하고 하늘로 올라 갔습니다. 그런데 이 인욕선인(忍辱仙人)은 제석천에 대해서 고맙다는 생각도 없고 가리왕에 대해 아무 괘씸한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도할에 양무심(塗割兩無心)이라 합니다. 전당포로 발라 줄 때에도 무심하고 할절신체(割截身體)로 사지백해(四肢百骸)를 찢어 놓을 때에도 무심했습니다. <전당포>를 발라 주는 제석천한테나 내몸뚱이를 잘라 낸 가리왕한테나 똑같이 양무심(兩無心)으로 아무 생각 없이 여여부동(如如不動)하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청담큰스님의 금강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든 것은 실상으로부터 (0) | 2016.01.25 |
---|---|
부루나존자의 인욕 (0) | 2016.01.24 |
막행막식은 바라밀이 아니다. (0) | 2016.01.22 |
신통은 반야가 아니다. (0) | 2016.01.21 |
초견성이 제일바라밀이 아니다. (0) | 2016.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