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수지(信解受持)
불교는 신해수지(信解受持)의 네 가지에 의지해서 점점 깊이 들어갑니다. 첫째, 믿어야 하고 둘째, 그것을 이해하고 깨쳐야 합니다. 금강경 산림법회(金剛經山林法會)를 한다는데, 실달태자(悉達太子)님이 깨달으셨다 하는데, 모든 사람에게 그것이 있다는데, 어떤 것인지 나도 좀 들어야겠다고 해서 들어서 이해하고 토론(討論)을 하고 연구를 하는 이것이 해(解)입니다. 이유 없는 믿음은 그건 미신(迷信)이고 사신(邪信)이 됩니다. 너는 생각하지 말고 어디까지나 내 말만 들으라고 하는 식이 미신입니다. 기독교의 독신자(篤信者)는 감기가 들어도 약을 안 먹습니다. 쌍화탕을 먹으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니 하나님이 나에게 이만큼 시련(試鍊)을 주고 고생을 주신 것인데 내가 약을 먹는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명을 거역하는 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맹목적(盲目的)인 믿음이고 무조건적(無條件的)인 믿음입니다.
불교에서는 신(信)을 앞세우고 해(解)가 뒤로 갑니다. 가령 불교에 처음 들어와서 여시(如是)가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던 분들도 계셨을 것인데, 이번 금강경 산림(山林)에 나와서 자꾸 듣다 보면 캄캄한 밤중 같던 여시(如是)의 뜻이 요새는 조금 알듯말듯할 겁니다.
불교는 이렇게 믿음 뒤에 해가 따라가는 것이므로 무조건 맹목적 믿음의 미신과는 다릅니다. 그러데 또 뭣을 좀 따져서 알았다고 해서 예컨대 이번의 금강경을 조금 들어서 「불교가 이런 것이구나.」하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고 해서 신심(信心)이 없어지면 「불교가 별거 아니구나, 내가 부처인데 뭐 절에 갈 것도 없고, 내가 마음만 착하게 쓰면 안되겠느냐?」하고 맙니다. 이래 가지고는 신앙생활이 되지 않고 그 이상은 들어가지 못해서 수도가 되지도 않고 대도(大道)를 성취하지도 못합니다. 다 되지도 않았으면서 다 된 것 같기도 하고 안 된 것 같기도 하여, 남이 부처가 되려 해도 틀렸고 안 되려 해도 틀렸고 까딱하면 틀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산보고 까딱하면 안 된다고 까딱거리고 물보고 까딱하면 안 된다고 까딱거리고 하여 까딱 안 하는데 걸려가지고 건방져서 그야말로 입으로만 하는 구두선(口頭禪)입니다.
실상 비슷한 이런 원리를 좀 알았더라도 관조반야(觀照般若)를 철저히 알기위해서 또 다른 교리를 들어야 하고 그래서 삼장(三藏)까지라도 다 통해야 합니다. 칠식(七識), 팔식(八識)에 잠재해 있는 깊은 허물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견성(見性)을 하고도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두루 익히고 오십이위(五十二位)의 보살행을 닦는 것입니다. 부처가 될 때까지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신(信)이 앞잡이로 끌고 나가고 다시 그에 대한 이유를 자꾸 연구해서 그럴 수 있겠다고 하는 진리를 깨달아 들어가고 그렇게 돼야 철저한 수행을 할 뜻이 더해져서 잘 받들어 지니게 되므로 이렇게 하여 잘 수지(受持)하게 되면 마침내 실상(實相)을 체득(體得)하게 되고 이렇게 함으로서 완전히 부처가 됩니다. 이것이 신해수지(信解受持)의 뜻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아무나 몇 천명이라도 다 부처님을 만났으니까 신(信)할 수 있고 깨달아 질 수도 있고 했지만 말세(末世)의 혼란할 때에는 일념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이 복잡하고 혼란해서 머리 속에 번뇌 망상이 왔다 갔다하고 들끓어대는 그러한 때에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신해수지하면 참 그야말로 이 세상에 다시없는 제일 가는 희유한 일이라고 수보리존자께서 찬탄하셨던 것입니다.
구공(俱空)을 실제로 체득하신 대아라한(大阿羅漢) 수보리존자께서 부처님의 아주 고구정녕(苦口丁寧)하신 참 대자대비하신 이 지도한 생각이라도 그르칠까 잘못 들었을까 해서 이렇게 참 애를 써서 일러 주신 것을 제가 40년동안 부처님을 모시고 법을 들었지마는 이렇게까지 남김 없이 조금도 아낌 없이 일러 주시는 것은 이번에 처음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대아라한과(大阿羅漢果)를 증득(證得)한 이니까 부처님은 아니지마는 성인입니다. 이런 분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부처님께서 참으로 너무나 감사하시고 대자대비하시게 남김 없이 조금도 아낌 없이 이렇게까지 사람을 지도해 주실 수가 있는가 해서 자연히 눈물이 났을 것입니다. 이제 이런걸 우리가 한편으로 보면 이것이 역시 감사해서 눈물이 쏟아지기도 했겠지마는 그 수보리존자 편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이 그저 잘 먹고 잘 살고 호강하다가 죽게 되면 죽는 다고 하는 이러한 생각으로 허망한 세상을 부득이해서 그러나 저러나 살 수 밖에 없다는 식으로, 할 수 없이 살던 우리가 이렇게 생사를 해탈하고 또한 생사에 자유로운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인간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이런 지도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자기도 한쪽으로 감사를 느끼고 동시에 만약에 부처님같은 어른을 만나지 못했다면 내 신세가 어떻게 될 뻔했느냐, 그저 멋도 모르고 전생(前生)이 있는지 우리는 그런 것도 모르고 앞으로 영원한 미래세(未來世)가 다하도록 생사고해(生死苦海)를 헤매고 그 참 어디 호소할 데도 없이 자업자득(自業自得)으로 제 죄를 제가 지어서 끝없는 고생을 할 뻔한 이 신세가 참 다행히도 이렇게 마지막 높은 도, 최후의 길을 걸어서 완전한 해탈을 얻게 된 자기자신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불교를 듣기 전에는 머리를 들고 갈 곳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다행히 이렇게 생사를 초월하고 또한 우주의 주재자(主宰者)로서 영원불멸한 자기의 생명을 건지게 된 것을 생각해 보니 과거를 회고(回顧)할 때 자연히 눈물이 나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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