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반야--般若 5
앞에서 말한 마음자리인 나 자신을 깨달은 것을 실상반야(實相般若)라고 했는데, 부처님께서 실상반야를 깨달으신 뒤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아함경·방등·반야·열반 등의 초·중·고·대학 같은 과정의 체계를 세우셨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아니면 하나님도 공자님도 구상할 수 없는 내용이고 체계입니다. 이런 지혜를 관조반야(觀照般若)라고 합니다. 실상반야가 체(體)이고 관조반야는 용(用), 작용(作用) 곧 활용(活用)입니다. 비유하면 실상반야는 물이고 관조반야는 수분(水分)의 작용(作用)인 이슬·파도·얼음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의 관조반야는 무엇을 따져보고 아는 것이 아니고 실상반야로 대보면 그냥 알아집니다. 마치 거울에 비친 대상물이 그대로 나타나듯이 연구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이 상을 보고 높다고 직관적으로 아는 것처럼 환하게 전지전능하게 다 아십니다.
발심수행(發心修行)을 해서 참선을 하든지 염불·진언을 하든지, 경을 보든지 기도를 하든지 용맹 정진하다가 견성한다 해도 번뇌의 깊은 밑바닥까지 뿌리째 뽑아 없애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다에 파도가 없을 때에도 육안으로 보이진 않지만 아주 미세하게 잔잔한 물결이 남아 있어서 이것이 모여 가지고 어느 땐가는 큰 파도가 됩니다. 이와 같이 최후의 잠재의식인 제8장식(第八藏識)도 정신을 통일해서 닦아 들어가면 차차 없어지고 자기 마음 하나 실재만 오롯하게 나타납니다. 본래 아무 것도 없고 정신 마음 하나니까 그렇게 되는데 이런 정도만 되어도 오래 있으면 신통(神通)이 납니다. 그러면 내가 이제 견성해서 부처가 다 된 줄 알고 아무런 행동이나 해도 괜찮고 막행막식(莫行莫食)을 해도 좋다고 하다가 잘못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지식을 못 만나면 이 몸뚱이가 없는 것인데 불을 지른다고 탈 것이냐, 도끼로 친다고 부서 질 것이냐 하면서 계율을 안 지키고 육바라밀을 안 닦아서, 만행공덕을 쌓는 거룩한 대승의 보살도를 게을리 하게 됩니다.
경을 자세히 공부하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이 참선하다 이렇게 잘못 되면 그 사람 말을 막을 수 없게 됩니다. 마음이 영특해져서 한마디 들으면 열·백을 알기는 아는데 자기가 부처가 다 된 줄 아는 고집이 생겨서 남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에 큰 도인 못 만나면 잘못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능엄경 같은 데에 이런 잘못을 경계하는 부처님의 말씀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야에도 젖먹이 아기 정도의 반야가 있고 유치원 정도의 반야, 국민학교·중학교 정도의 반야, 대학교 석사·박사정도의 반야가 있어서 견성을 해서 반야가 열렸다 해도 번뇌의 깊은 뿌리까지 뽑혀진 완전무결한 실상반야의 경계를 참선하기 전에 다 배워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이런 반야를 중생에게 정도에 맞추어 체계적으로 가르쳐 주시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자세히 말씀해 주셨고 육백부의 대반야경을 말씀해 주셨던 것 입니다.
이 금강경은 대반야의 六백부 경을 총결산한 반야의 핵심 경으로서, 앞에서 말한 아공(我空)·법공(法空)·구공(俱空)의 도리를 잘 설파(說破)한 경이므로 이것을 공소식(空消息)이라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이 금강경의 공소식을 말씀하셨을 때는 이미 四十년 동안이나 인과(因果)의 도리를 말씀하셨고 계행(戒行)과 바라밀법(波羅蜜法)과 대·소승의 온갖 수행법을 말씀하시고 난 뒤였으므로 그 당시의 천 이백 대중은 이 공의 도리를 잘못 이해할 이치가 없겠지만, 이런 도리를 전혀 모르고 불교 사상이 이것뿐인가 보다, 이만하면 부처가 다 된 것이로구나 하며 구경각(究竟覺)에 도달하지 못했으면서 굵은 번뇌망상(煩惱妄想)만 없어진 것을 가지고 다 된 줄 잘못 알고 방심하여 마음을 풀어서 술·고기 먹고 오입하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다보면 깊은 잠재의식 속에 미세한 허물이 차차 도로 일어나서 마지막에는 태산을 무너뜨릴 큰 파도로 됩니다. 언제 그렇게 됐는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인과(因果)의 도리 삼법인(三法印)·사제법(四諦法)·삼칠조도품(助道品)·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과 육바라밀(六波羅蜜)·반야경(般若經)등의 말씀을 하신 것은 이런 잘못이 없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실상반야와 관조반야에 대해 부처님의 이런 말씀을 문자반야(文字般若)라고 그럽니다. 실상반야의 그 자리는 말이나 글로 표현될 수 없지만 문자반야는 중생으로 하여금 마음을 닦아서 실상반야에 들어가게 하기위한 안내서로서 말과 글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정말 부처가 되려고 원을 세운 사람이면 경을 자세히 봐서 반야가 어떤 것이고 어떤 것이 정말 견성이라고 하는 것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촌사람 금강산 구경 하듯이 해서는 안 됩니다. 금강산 구경을 제대로 하자면 적어도 일 년은 걸려야 하는데 촌사람이 남 따라갔다가 바쁘다고 二·三일 둘러보고 오면 누가 물어 봐도 “아아, 굉장하더라.”하는 소리 밖에 못합니다. 이런 식으로 연구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공부해서는 자기가 정진해서 얻은 정도가 어디쯤 왔는지를 모르게 됩니다.
반야경을 “고름 닦아 놓은 종이” 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구경각(究竟覺)에 들어가서 부처가 다 된 뒤에 경이 소용없을 적에 하는 말이지, 아직 공부를 마치지 못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반야경을 걸머지고 다녀야 합니다. 오조 홍인(五祖 弘忍)스님도 육조 혜능에게 금강경을 전하셨고 육조 스님께서는 후학들을 위해 금강경의 뜻을 친히 풀어서 말씀 해주신 것이 오늘날 까지 전해 오고 있습니다. 설사 부처가 되었다 해도 부처님께서는 필요 없지만 중생에게는 역시 필요하게 됩니다. 유치원 교과서와 마찬가지이고 어린 아기를 가르치는 그림책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조국사(普照國師)·서산대사(西山大師)같은 조사(祖師)님들께서 선교(禪敎)가 둘이 아니고 부처님의 <말씀>과 부처님의<뜻>이 하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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