싣달태자의 바라밀--波羅蜜 2
싣달태자께서도 三천년 전에 이것을 걱정했습니다. “사람은 죽는다, 나도 죽을 것이다, 어느 누가 나를 죽게 만들었으며 왜 그렇게 된 것인가.” 그 깊은 비밀을 낱낱이 파헤치고 쳐부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주는 상대적 원리로 되어 있다, 높은 것이 있으면 낮은 것이 있고 더운 것이 있으면 찬 것이 있고,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고 전부 이렇게 대조적인 원리로 되어 있으니 죽는 것의 대조는 안 죽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죽지 않는 원리가 있을 것이다, 내가 안 죽는 원리를 발견하고야 말겠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밤새도록 잠도 못 잤습니다. 마침내 싣달태자는 궁전과 미녀를 버리고 산으로 도망가서 인도 천지에 있는 도인들을 다 만나 물어 봤지만 몇 백 년 몇 천 년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지 않으나 아주 안 죽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조금 오래 사는 것이 원이 아니고 영원히 안 죽는 방법, 허공이 없어진다 해도 안 죽는 원리를 발견하자는 것이 나의 원이다.” 이렇게 생각한 싣달태자는 개소리 닭소리 안 나는 산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서 그 해결을 위해 참선을 했습니다.
“내가 영원히 안 죽는다. 뭐가 그리 영원히 안 죽느냐?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나>다. 그러면 내가 무엇인데 영원히 안 죽나.” 가만히 자꾸 따집니다.
“이제까지 <나>라고 하는 것은 육체였는데, 만일 육체가 <나>라면 영원히 안 죽을 수 없다. 그러면 정신이 <나>인가. 그러나 이 생각 저 생각 변화무쌍하니 그 가운데 어느 생각을 <나>라고 할 수도 없다.” 싣달태자는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들어서 모든 생각이 어디서 나오나 살펴보았습니다. 싣달태자의 생각은 아버지 생각도 어머니 생각도 아우 자식의 생각도 아니고 확실한 자기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생사를 면(免)해야겠다, 영원히 죽지 않는 원리를 찾아보자, 이 생각은 분명히 내 생각이다, 그러나 내 생각을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생각을 내는 <나>는 무엇인가. 생각을 내는 것이 <나>지 생각이 <나>일 수는 없다. 그러니 생각을 나게 하는 이 주체가 무엇인가.” 이것이 의문으로 되었고 일차적인 결론이었습니다.
“허공은 아는 능력이 없으니 생각을 내 놓을 수 없다. 그렇다고 지구나 바위나 땅 속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그러니 확실히 무엇을 생각하는 이 주체는 물질도 허공도 아니로구나. 이것들은 생명이 없으니 무엇을 생각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확실히 물질도 허공도 아닌 것이 생각을 내고 그것이 바로 <나>로구나. 또 확실히 물질도 허공도 아니니 생사가 없겠구나. 육체가 <나>라고 하지만 육체도 따지고 보면 결국 물질임에 틀림이 없고 지식이라는 것도 생각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이 지식 또한 <나>는 아니다. 육체와 지식을 초월한 모든 생각의 핵심이 <나>이니 이 <나>야말로 죽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한 뒤부터 싣달태자는 六년 동안 가속도(加速度)로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은 말이 가속도로 생각을 했다고 하는 것뿐이지 실제로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니고, 한 것도 안 한 것도 아니라고 해도 안 되고 가만히 있었다고 해도 안 되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고 해도 안 됩니다.
남한테 아주 분한 소리를 들으면 생각할수록 분이 더 나서 밥을 먹을 수 없게 됩니다. 저녁에 드러누워 자려고 해도 잠이 안 와서 벌떡 일어나 앉아 있게 됩니다. 날만 새 봐라 칼을 가지고 너 죽고 나 죽자 하고 분한 생각 하나로 골똘하게 될 뿐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떤 중대한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딴 생각을 멈추고 한 가지 문제에 정신을 집중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정신통일, 주의집중(注意集中)의 힘을 가속화(加速化)하여 인생일대의 생사문제를 앞에 놓고 일념부동(一念不動) 깊은 마음의 바닥을 향해 들어가는 것을 선정(禪定)이라고 하는데 싣달 태자는 이렇게 해서 마음을 깨쳐 부처를 성취했습니다. 그래서 우주에 대자유하고 번뇌·생사의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을 얻었습니다. 생각의 주체인 <나>, 우주와 인생의 핵심인 <마음>,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마음>, <참나>를 깨달아서 저절로 바르게 아는 지혜를 <반야지혜>라 하고 <보리설법(菩提說法)>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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