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줄 아는 마음자리--般若 4
육신은 기계와 같고 자동차와 같으며 마음자리는 운전수와 같고 기사와 같으며, 몸뚱이가 옷이라면, 말하고 듣는 마음자리는 옷을 입은 사람 몸에 비유됩니다. 그러므로 알줄 알고 말할 줄 아는 이 마음자리인 나는 육체를 뒤집어쓰고 있을 때나 몸뚱이를 걷어 치웠을 때나 변하지 않습니다. 중생 놀음하는 범부 시절에도 마음자리는 조금도 덜 함이 없이 제 성능을 다 하고 있으며, 이다음에 성불해서 부처가 되었을 때도 무엇을 알 줄 아는 그 힘은 더 거룩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마치 소금을 입에 집어넣어서 짠 맛을 아는 것은 아기 때나 학사 박사 때나 변함없이 똑같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알 줄 아는 이 성품은 분별을 하는 생각과는 다릅니다. 아무 것도 없는 바닥에 거울을 엎어 놓으면 아무 그림자도 없이 깨끗한 거울의 바닥뿐이지만 바로 젖혀서 물건을 갖다 대면 무엇을 대하든지 그대로 다 나타납니다. 만일 빨간 옷감을 대면 거울 전체가 빨갛게 물든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다고 해서 거울이 실상 빨갛게 물든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거울은 빨간 헝겊을 댔을 때나 아무 물건도 안 비췄을 때나 깨끗해지고 더러워 질것이 없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 마음자리도 말하고 듣고 죄를 짓고 선을 행하고 온갖 짓을 다 하지만 알 줄 아는 마음자리는 항상 그대로입니다.
육체는 산채 그대로 송장입니다. 눈동자가 무엇을 볼 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지각성(知覺性)을 가지지 못한 그것이 생리적(生理的)으로 체계(體系)있게 조직이 되어 있다고 해서 알 줄 아는 능력이 물질에서 나올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눈이 볼 줄 알고 귀가 들을 줄 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범부였을 때는 눈을 빌어서 보기는 하지만, 그것은 마치 사람이 뚫린 창구멍으로 밖을 내다보고 사진기의 렌즈를 통해서 사진을 찍듯이 사람이 창구멍으로 비치는 것들을 내다보고 알고 렌즈에 찍혀 나온 물건을 보고 느끼고 아는 것이지, 창구멍이나 렌즈 그 자체가 알 줄 아는 것은 아닌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눈이 보고 귀가 듣고 코가 냄새 맡는 것이 아니라 알 줄 아는 마음자리가 직접 보고 냄새 맡고 듣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허공 그것이 무엇을 보고 듣고 할 수 없고, 물질이 본래 원자 전자 시대부터, 에너지 시대부터, 그 이전부터 무엇을 지각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무엇을 알 줄 아는 능력이 본래 없는 무정물질(無情物質)로 조직된 이 육체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알 줄 아는 마음자리를 성품(性品)이다, 불성(佛性)이다, 보리(菩리)다, 진여(眞如)다, 한물건(一物)이다 하지만 제일 가깝게 말하면 <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 줄 아는 힘이 있는 성품을 유정(有情)이라 하고 동물(動物)이라 하는데, 돼지·고양이·개의 형상을 뒤집어쓴 몸뚱이가 유정이란 뜻이 아니고 그것을 뒤집어쓰고 이리저리 다니는 운전수를 동물이라 하고 유정이라 합니다, 몸뚱이는 하나의 물질이고 말할 줄도 들을 줄도 모르는 무정물(無情物)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알아지는 인식의 대상이 있고 아는 자신, 곧 주관이 있어서 아는 것은 분별심으로 아는 망상이고, 있다 없다 하는 생사법(生死法)입니다. 산을 보고서 높은 줄 알고 물을 보고 깊은 줄 아는 그 자리, 생각 아닌 자리, 생각을 일으키기 전의 온전하고 오롯한 자기 마음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음자리에서 보면 과학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심지어는 발심(發心)하느니 성불(成佛)하느니 생사를 해탈(解脫)하느니 하지만 다 잡된 생각입니다. 본 마음자리를 미(迷)해서 생사(生死)의 보(報)를 받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런 생각을 하긴 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이것은 다 부처가 되기 전, 내 마음을 돌이키기 전의 일이고 제 정신을 똑똑히 제대로 찾은 사람에게는 일체의 생각을 다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성불해야 하겠다. 생사를 해탈해야 하겠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무상(無常)하다”고 하지만 이것도 모두 다 쓸데없는 생각일 따름입니다. 부처가 된다는 생각도 없어지고, 그것이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도, 없어졌다는 생각도 없어져서 온갖 생각이 없어진 자리에 들어가면 “성품(自性)이 이렇구나, 내가 견성(見性)을 했구나.”하는 생각이 누구나 한번 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아차!” 하고 곧 그 생각을 돌려서 저절로 끊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구나”하는 생각도 망상(忘想)이기 때문입니다. 이 생각 저 생각 다 버리고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객관대상(客觀對象), 곧 산보고 높은 줄 알듯이 객관의 사물을 아는 것이 아니라, 제가 저를 알 때는 아는 걸로 아는 것이 아니고 다만 객관세계를 보고 잘못 안 지식을 정리 해 버리는 것이므로 아무 생각 없고 아무 허물없는 알 줄 아는 마음만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알았다는 생각도 저절로 없어집니다.
일체 생각이 아닌 이것이 온갖 사상이 되고 인과(因果)의 업(業)을 지어 육도(六道)에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데 이 한 놈이 한 짓이고 이 한 놈은 절대적인 초절대의 실재(實在)이고 실상(實相)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마음자리 이것이 있다는 것을 [금강반야바라밀경]이란 경 제목의 해설을 들음으로써 짐작이라도 하게 되는 것은 마치 담 너머 쇠뿔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확실히 담 너머에는 소가 있겠다고 인식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들 자신에게도 시방제불(十方諸佛)이 깨치신 도리가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짐작 하는 것을 경학(經學)에서는 해오(解悟)라 합니다. 깨달아서 그 경지에 들어가서 아는 게 아니고 생각으로 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알 줄 아는 이 마음자리는 지혜라고 할 수도 없고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초 절대(超絶對)도 아니고 하나조차도 아닌 자리입니다. 굳이 말하자니 실상(實相)이라 하고 반야라 하는 데 이것이 금강반야입니다. 그런데 반야에도 그 내용을 몇 가지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중생들이 이 반야의 본성이 미(迷)해서 종소리 하나를 가지고도 한국 사람은 땡땡으로 듣고 일본사람은 강강으로 듣고 서양 사람은 딩동으로 들으니 이것은 다 업보중생(業報衆生)이기 때문입니다. 업에 따라서는 지옥을 천당으로 보고 천당을 지옥으로 보고 사바세계를 극락으로 착각하며 온갖 고생을 하기 마련인데, 이것도 지혜이므로 반야는 반야입니다. 그러므로 반야에도 바른 반야, 잘못된 반야가 있고 깊은 반야도 있고 얕은 반야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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