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실상으로부터
이러한 인욕도 실상자리를 깨쳐서 무심한 마음의 본체를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실상자리가 배고프면 밥 생각하고 산 보면 높은 줄 아는 것이니, 모든 것은 근본실상(根本實相)이 하는 일이고 무심체(無心體)가 아는 거지 생각이 따로 있어 아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자리는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니 금송아지 얘기처럼 이 마음 자체가 무슨 관념이 있는 것이고 어떤 생각이 있는 존재라면 다른 것은 모릅니다. 제 생각이 벌써 하나 정해져 있어서 딴 것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보이지도 않으니까 그런데 이것이 일체 생각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닥치는 대로 압니다.
산 보면 높다 물 보면 깊다고 아는 것은 높은 것도 깊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두 가지를 다 압니다. 거울에 먼지 투성이가 시꺼멓게 붙어 있으면 무엇을 비춰도 안 나타납니다. 중생 범부들은 탐심 . 치심 . 욕심덩어리의 온갖 먼지가 마음자리에 묻은 셈입니다. 일상생활(日常生活)의 쉬운 예로 차려 자세를 해도 몸이 가만히 오래 있는 사람이 아주 드문데 이것도 그 마음에 때가 많이 묻고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이 세계에서 부동자세를 잘 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실상자리와 마음이 쉽게 계합(契合)할 수 있는 소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실상자리인 마음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있게도 보이고 없게도 보이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유정 무정(有情無情)이라는 관념도 응무소주(應無所住)해서 봐야 유정 무정이 다 부처가 돼 있는 내용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또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하는데 있어도 있는 걸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있는 걸로 없고 없는 걸로 있고 있는 것 그대로가 없는 것이니 그것이 곧 진공입니다. 없는 것도 있는 것도 아닌 참말로 없는 겁니다. 있는 채로 없는 게 참말 진공이지 요새 진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있는 채로 없는 게 이것이 참말 진공이지 요새 진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현상이고 보니까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 마음도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부르면 네 하고 똑똑히 대답을 합니다. 무슨 일을 하라고 시키면 그대로 가서 하고 이렇게 하는 걸 보면 있는 것이고, 또 그렇다고 해서 찾아 가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시방(十方)을 초월하고 유무(有無)를 초월하고 부처도 중생도 아닌, 생사도 열반도 아닌 이것이 없는 겁니다. 이렇게 없는 가운데서도 분명히 설법을 하고 여기 이렇게 듣고 앉아 있습니다. 듣는 것인 줄도 알고 말하는 것인 줄도 아니까 하는 말인데 부처님께서 가리왕에게 사지를 찢기고 마디마디를 찢길 때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참았지, 만일 그때 내가 내라는 생각을 내든지 육체를 내라고 단정해 버렸다면 도할양무심(塗割兩無心)의 인욕을 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무심경계에 못 들어갔더라도 정말 발심을 했다면 아파 죽으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잘못했습니다 하고 죽지만, 남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불교 이론을 확실히 알아 놓으면 원망해야 내 신세만 낭패고 죽어서 삼악도(三惡道)로 갈 텐데, 내가 맞아 죽는 것도 억울한데 남을 원망해서 삼악도 까지 가면 내 신세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단식하고 순교할 각오로 하는 것은 정법으로 죽는다는 게 마음입니다. 옳고 바른 생각 아무 생각 없는 데서 죽고 그리고 나를 죽이는 사람을 도리어 빌어 줍니다. 이것이 이생기심(而生其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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