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장부아장부(彼丈夫我丈夫)
피장부아장부(彼丈夫我丈夫), 너도 대장부고 나도 대장부니 피차 똑 같은 부처자리인데 어쩌다 같은 사람끼리 한 사람은 곡차(穀茶) 잔이나 먹어서 비틀거리는 것 붙들어 주는 턱입니다. 술이 취해서 부처와 중생이 똑같은 자리, 똑똑하게 아는 그 바탕이 흐뭇해진 것뿐입니다. 학문이다 지식이다 과학이다 종교다 하고 따지고 배우고 연구하며 내가 어떻게 하든지 남보다 잘 살아야겠다는 생존경쟁심으로 머리를 짜내고 잠을 안자고 온갖 꾀를 내어 별별 짓을 다 하지만 이런 것은 다 그릇된 착각(錯覺)이고 지식의 장애라는 뜻으로 번뇌장(煩惱障)·소지장(所知障)이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一切) 아는 것을 다 포기(抛棄)해서 지식을 초월했으므로 산이 높다는 생각 없이 산을 보고 쇠가 돌이나 나무보다 무겁다는 관념(觀念)이 없이 일체의 지식, 망상을 다 초월해 버리고 나면 시간이니 공간이니 하는 것을 다 초월한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러면서 그것이 우주 전체(宇宙全體)인 자기 본래의 마음자리를 깨치고 보면 먼 데 것도 아니고 가까운 데 것도 아니고 전체가 환히 다 드러난 것입니다. 요새 물리학(物理學)·화학(化學)·천문학(天文學)등의 과학(科學)이 환상(幻想)이거나 과거(過去)에만 있고 지금은 없는 것이거나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눈으로 볼 수 없고 증명(證明)할 수 없는 학문이 아니듯이, 우리 마음자리를 깨친 경계도 그와 같이 사무쳐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부처님은 과거사(過去事)를 다 아신다고 신통(神通)이라고 하지만 성불(成佛)하고 보면 사실은 본래 그런 것뿐이고 모든 착각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이어서 종소리가 깡깡이다 땡땡이다 하고 듣는 그런 업을 해탈(解脫)했기 때문에 전에는 과거를 과거인 줄 알고 봤던 것인데 이제 보니 항상 목전지사(目前之事)입니다. 비유하면 어린 아이들에게 하나에 둘을 더하면 몇 개냐고 물으면 한, 둘 꼽아 보고서야 셋인 줄 알고 어른들도 좀 복잡한 계산은 수학적인 지식을 빌어서 알게 되지만 부처님은 항상 나타나 있으니까 연구하고 셈을 해서 아시는 것이 아닙니다. 일체를 분별하지 않고 즉각으로 아는 무분별지(無分別智)입니다.
그러므로 과거 일을 알되 더 잘 알고 종소리를 듣되 과거 중생인 때 듣던 땡땡, 강강으로 들을 줄도 아시고 또 일체 중생이 그런 식으로 듣고 있는 줄도 아십니다. 그러니까 당신도 강강으로 들으면 그렇게 들리기도 하고 그리고 강강 땡땡을 초월해서 종소리의 실상(實相)을 들으실 줄 아시는 것이 부처님께서 우리보다 우월(優越)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꿈 가운데 들어가서도 자유하고 꼭 꿈 같이 꿈 사람하고 중생의 살림살이를 차리시기도 합니다. 예컨데 석가여래께서 범부중생이 볼 때엔 밥 먹고 오줌 누고 대변 보고 저녁때면 잠자고 다 합니다. 그렇지만 도가 높은 보살님들이 볼 때는 부처님은 음식을 잡수신 일 없고 육신으로 부처님을 보는 것이 아니므로 부처님께서 오신다 가신다 주무신다 그런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불보살님의 경지에서는 시간이니 공간이니 하는 것이 한낱 환상(幻想)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과거사(過去事)를 알고 부처님께서 신통(神通)하다고 하지만 성불(成佛)하고 보면 신통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에게는 현실 세계가 실재(實在)해 있는 것 같고 육도세계(六道世界)에 윤회(輪廻)하는 것이 사실인 듯 하지만 실상은 우리가 꿈속에서 천당(天堂)갔다, 지옥(地獄) 갔다, 돌아다니는 것이고 참말로 간 것이 아닙니다. 최면술(催眠術)에 걸린 사람이 몸뚱이는 가만히 앉아서 동경 갔다 왔다 하고 꿈을 꿀 때에도 몸뚱이는 가만히 놓아두고 비행기를 타거나 날개를 붙여서 돌아다니지만 전부 거짓말이고 꿈을 깨고 나면 다 허사(虛事)입니다. 조신대사(調信大師)가 잠깐 동안의 꿈속에서 팔십년을 살았듯이 과거(過去)니 미래(未來)니 하는 것도 사실로 있는 과거·미래가 아니라 지금의 현재입니다.
불이 꺼져도 눈으로 깜깜하게 어두운 것을 보고 불이 켜져도 환하게 밝은 광명을 보는 것이니 어두운 때나 밝은 때나 보는 눈은 변동이 없고, 이 마음자리는 볼 때나 안 볼 때나 변하지 않습니다. 중생들은 미래 것은 모르고 과거의 기억(記憶)은 희미해져서 망각(忘却)해야 되는 것은 번뇌망상(煩惱妄想)으로 경계를 치고 그 틈바구니에 끼여 있기 때문에 망상 그것만이 나인 줄 알고 깨끗하고 자유자재(自由自在)한 본체(本體)가 있다고 여간 설명해 줘 봐도 좀처럼 인정(認定)할 생각을 내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망상이 어떤 자체가 있어서 능동적(能動的)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러는 것이고 마음의 본체가 그러는 것입니다. 마치 파도(波濤)와 물이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물의 움직임이 파도고 파도 자체가 물이듯이 실상 망상도 마음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이 착각(錯覺)을 한 것이 망상일 뿐 마음을 다 정리해 놓고 보아도 그전 마음 그대로입니다. 산은 높은 그대로 있고 물도 깊은 그대로이며 성불(成佛)을 해도 항상 그대로입니다.
가령 우리가 중생살이 꿈속·생사대몽(生死大夢)·천당(天堂)·지옥(地獄)으로 돌아 다녔지만 그것이 참말로 돌아다닌 것이 아닙니다. 마치 최면술에 걸린 아이가 그 몸뚱이는 가만히 두고 꿈속에서 모양으로 비행기를 탔거나 날개를 붙여 가지고 동경을 갔다 왔다 하지만 그리고 본인도 그런 줄 알지만 꿈을 깨보면 그것이 전부 거짓말이고 전혀 허사이듯이 우리의 천당·지옥의 중생놀음 이것도 역시 최면술에 걸려 가지고 왔다 갔다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조신대사(調信大師)가 눈 뻔히 뜨고 80년을 꿈 가운데 있었듯이 중생의 생멸심으로 과거니 미래니 하지만 과거사(過去事)라고 하는 것이 실제의 과거가 아니라 알고 보면 곧 현재고 미래도 그런 것입니다.
억만년 전의 과거가 지금이고 몇 만겁을 지낸 미래도 역시 현재입니다(亙萬古而長今 歷千劫而不古). 그러니까 우리가 듣기에는 타심통(他心通)이니 숙명통(宿命通)이니 하지만 그게 타심통도 아니고 숙명통도 아니고 오직 항상 눈앞에 있는 목전지사(目前之事)입니다. 그러면서 분별(分別)이 아니고 망상(妄想)이 아닙니다. 흔히들 체(體)니 용(用)이니 하는 개념(槪念) 때문에 잘못 생각하기 쉬운데 체와 용이 둘이 아닙니다. 우리 눈은 아까 불이 꺼져도 어두운 것을 보고 있고 불이 켜져도 밝아진 것을 보고 있으니 어두운 때나 밝은 때나 보는 눈은 변동이 없고 항상 상주(常住)하듯이 볼 때나 안 볼 때나 이 마음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본래가 혼란도 아닌 가운데 혼란을 일으켜 가지고 혼란이지만 그것도 본체(本體)인 내가 그러는 것이지 망상 자체가 따로 있어서 독자적(獨自的)으로 그러지는 못합니다. 마치 파도와 물이 본래부터 그 본체가 다른 것이 아니라 물이 움직이는 것이 파도고 물과 파도가 둘이 아닌데 우리가 착각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착각을 떼어 버리고 마음을 다 정리해 놓고 보면 그때도 산은 높은 그대로 있고 물은 깊은 그대로 있어서 성불을 해 놓은 뒤에도 피장부아장부(彼丈夫我丈夫)의 본래 면목 알 줄 아는 성품은 그대로입니다.
'청담큰스님의 금강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육조스님과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主而生其心) (0) | 2015.12.07 |
---|---|
체와 용은 둘이 아니다(體用不二) (0) | 2015.12.06 |
배움도 얻음도 없다. (0) | 2015.12.04 |
原 文 :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爲大不 須菩提言 甚大世尊 何以故 佛說非身 是名大身 (0) | 2015.12.03 |
原 文 : 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 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 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0) | 2015.1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