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큰스님의 금강경

체와 용은 둘이 아니다(體用不二)

如明 2015. 12. 6. 08:23

체와 용은 둘이 아니다(體用不二)

그러므로 혜(慧)는 일체 생각을 내지도 않고 작용(作用)을 내지 못하는 자리지만 용(用)을 일으키면 온갖 것이 중생과 같을 수 있다는 것이 체용(體用)의 개념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금강경 말씀하시기 전 법공(法空)을 말씀한 때는 그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소위 우리 자성을 항상 참되고 불변한다고 해서 진여(眞如)라고 하는데, 이 진여가 허공처럼 영원불변하는 진여도 있고 또 현상계(現象界)의 인연을 따라서 용을 일으키는 진여도 있어서 대승시교(大乘始敎)에 들어오면 두 가지로 말합니다만 그런데 지금 금강경 설명(說明)하실 때만 해도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금강경의 경지(境地)는 관조반야(觀照般若)·실상반야(實相般若)가 둘인 듯해도 실상은 하나이어서 관조반야가 내내 실상반야고 실상반야가 그대로 관조반야다. 물이 곧 파도고 파도가 곧 물이다. 체니 용이니 가리려고 하면 이미 불교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게 금강경의 특색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무분별지(無分別智)로 분별없이 아시고 과거사(過去事)도 미래사(未來事)도 분별없이 아시고 중생을 제도하시는 것도 분별없이 제도하십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견성(見性)하는 그날부터 종일설이미진설(終日說而未盡說)로 하루 종일 말을 해도 말한 것이 아니다. 견성을 하고 나면 무슨 색안경을 끼고 어떤 조건으로 무엇을 하지 않고 다만 무심한 마음으로 무심중에서 말을 하고 듣고 하므로 마치 바람소리와 물소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둘이다 셋이다 하는 것도 앞에 나타나니까 무심히 알지 우리 모양으로 어떤 선입주견(先入主見)을 가지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거울에 물건이 비치는 것과 같은데 가만히 그림만 비치는게 아니라 일체 동작을 우리와 같이 하는 것은 움직임이 곧 움직임이 아닌 때문입니다. 꿈속에서 움직였다는 것이 꿈 밖에 가면 사실 아무것도 아닌 전혀 거짓말이듯이 사실로 가도 간 것이 아니고 와도 온 것이 아니고 가도 오도 안했다고 해도 가도 오도 안 한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아까 그 최면술에 걸린 애가 동경을 왔다 갔다 했지만 안 갔다 해도 말이 안 되고 안 간 걸로 간 거고 간걸로 안 간 거와 같이 부처님의 지경(地境)은 이런 부사의경계(不思議境界) 이어서 체니 용이니를 가지고 비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야경, 금강경 전에는 체와 용을 나누어서 일체를 망상이라 하고 심지어는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도 망상이라 봅니다. 그러나 대승종교(大乘宗敎)인 법화경(法華經) 열반경(涅槃經) 화엄경(華嚴經)에 들어가면 체용이 둘이 아닌 수즉파 파즉수(水卽波波卽水)로 물이 곧 물결이고 물결이 곧 물인 도리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무심하기 때문에 무심 자체(無心自體)의 본 마음이 아무 생각이 없어서 미한 것도 아니고 깨친 것도 아닌 한 생각도 없는 그 자리에서 49년간 설법도 하고 또 인도에만 나타나셨다 하지만 천백억 화신을 나타내시어 색구경천(色究竟天)에 노사나불(盧舍那佛)도 석가여래(釋迦如來)의 화신(化身)이고 그럽니다. 그렇지만 석가여래께서는 한 생각 까딱해 보신 일이 없습니다.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닌 무분별(無分別) 그 자체가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설법을 하고 제도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녹음기나 라디오와 한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종일 일해도 괴로운 줄 모르고 피로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 모양 체용(體用)이 다르다면 하는 일이 힘들고 괴로움이 따를 겁니다. 사실은 중생들도 체용(體用)이 다르지 않고 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되는 셈입니다. 중생들의 마음의 본 바탕자리는 무심(無心)이니까 무심 자체(自體)가 천당업(天堂業)을 지녀가지고 천당생각을 내면 천당이 나타나고 부처님 역시 천당 생각하면 천당이 나타납니다. 다만 중생은 그것에 속고 부처님은 속지 않으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무심경계(無心境界)에서는 체용(體用)이 둘이 아니므로 생각이 움직여도 무심히 움직인 것이어서 움직인 게 아닙니다. 마치 물이 일어나고 꺼지고 해도 물의 본성질에는 아무 변동이 없듯이 이 무심히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체용이 둘이 아닌 구경(究竟)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부처님뿐 아니라 중생들이 제가 몰라서 그렇지 중생들 자신도 본래는 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는 모든 개념이 다 떨어진 근본 자체이고 그야말로 나 하나뿐이므로 대 자유한 것이며, 이 자리는 생각해 볼 수도 없는 부사의경계(不思議境界)인데 체용(體用)을 가르는 따위는 용납(容納)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십대제자(十代弟子)를 비롯한 큰 비구승들이 유마거사(維摩居士)에게 가서 모두 한 방망이씩 맞는 것도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체용불이(體用不二)의 도리를 보이는 대문(大門)입니다. 아란존자(阿難尊者)께서 참기름을 얻으러 갔다가 마침 유마거사의 집으로 가게 됐는데 유마거사는 「그것을 무엇하려고 하는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등에 종기가 나셔서 기름을 발라 드리려고 합니다.」라고 그랬습니다. 부처님의 몸은 해탈공신(解脫空身)이고 환신(幻身)이라서 부스럼같이 보이지만 사실 부수럼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본래 꿈이니까 시방제불(十方諸佛)이 꿈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했음을 보이시기 위해 중생과 똑같이 그러하신 것입니다. 본래 환(幻)의 존재고 망(妄)의 존재인데 우리는 육신을 참말로 있는 물질적 과학적인 실재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온갖 나쁜 업(業)의 버릇을 정리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했다는 소리가 본래 면목을 증득했다는 말인 동시에 환(幻)을 증득했다, 삼계가 환임을 체득(體得)했다는 뜻으로 증득제환(證得諸幻)이라 그럽니다.

이렇게 완전한 환이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해도 거리낄 게 없으며 돼도 안 된 것이고 안 된 것이 된 거고 되고 안 된 것도 없고, 그러면서 그것이 말과 이론이 다 끊어진 자리가 무심체(無心體)이고 불보살의 마음자리입니다. 부처님께서 어떻다 하지만 사실 우리도 그 무심체가 움직이는 대로 지옥으로도 되고 천당도 나타나고 사생육도(四生六道)가 다 나타나고 그러면서 거기 딴 개념을 하나 더 가진 것 그게 중생의 허물입니다. 주관·객관이 따로 있고 육체가 나 인줄 알고 개나 소나 사람이나 중생 노릇 밖에 못하는 허물, 그것은 사실 그런게 아닌데 잘못 안 허물입니다. 돌이 돌도 되고 쇠도 되고 사람도 되고 세계도 되고 공간도 되고, 허공도 온갖 게 다 되는 데 이 돌은 부셔 봐도 돌가루일 뿐 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되는 것뿐입니다. 꿈속에 있는 바윗돌이 무거워서 들지 못할 것이라는 관념 때문에 못 드는 것입니다.

중생들이 이렇게 망념(妄念), 착각(錯覺) 때문에 모든 것에 걸려 있고 마음대로 안 되지만 사실은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 내가 마음대로 안 되도록 해 놓은 것이고 사물에 얽혀 있는 것도 부자유한 것도 내가 부자유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므로 결국은 마음대로 되고 있는 셈 입니다. 그러니 한쪽 신통은 얻은 셈이 됩니다. 이렇게 한 쪽 신통만 고집하다 도리어 구속당하는 중생의 허물을 벗어나는 비밀방법은 오직 한 길 무심(無心)뿐이니 인간은 모든 생각 비울 것 밖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그 전체를 쓰지 못하고 한쪽 신통만을 고집해서 도리어 구속을 당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