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菩薩 莊嚴佛土不 不也 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解 義] 『수보리야! 그러면 네 생각에 어떠하냐? 보살이 중생의 마음을 거룩하게 교화하여 불토를 장엄하는 것이 아니냐? 어떻게 생각이 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오면 보살이 중생의 마음을 청정하게 교화하여 불토를 장엄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름이 장엄하는 것이지 실제로 하는 장엄은 아니기 때문이옵니다.』하고 수보리존자께서 대답하십니다.
장엄불토(莊嚴佛土)란 것은 아무 생각 없이 무심함으로 해서 무심한 것이 가장 큰 복을 짓는 것을 뜻하니, 복의 근본이 무심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복은 우주를 자유할 수 있는 것을 뜻하는데 그것은 곧 무심입니다. 중생들은 이와 반대로 유심(有心)하기 때문에 범부중생이니, 유심이라는 말은 소유욕이고 점령이고 욕심입니다. 차지하려 하기 때문에 자꾸 없어져 가고 욕심을 부리면 망해 가고 욕심을 덜면 부자가 됩니다. 우리가 지금이라도 욕심만 초월해 보십시오. 먹을 것도 넉넉해집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경제가 곤란하다 해도 서울 생활수준을 보면 지금 불란서 파리나 영국 런던과 같이 하는 이가 많습니다. 물질이 없는 게 아니라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 국가사회를 위해서 일을 잘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뼈 빠지게 농사를 짓게 되고 장사하는 사람은 이문 적게 먹고 저기 있는 것 여기 갖다 주고 여기 있는 거 저기 갖다 주고 하루 밥 세끼 있으면 그만입니다. 또 대통령은 온 국민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를 잘 살피어 제가끔 뜻에 맞도록 해주어서 모든 분야가 잘 발전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뿐입니다. 욕심을 내서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한국도 장엄불토를 해야 하고 남북통일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게 욕심으로 되는 것이냐 하면 무심함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무심이라 해도 작심(作心)으로 하기는 하지마는 무심입니다. 천당도 올라가면 28천(二十八天)이 있는 데 그것도 다 욕심이 적고 복을 많이 심은 정도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불보살은 무심하다 보니 장엄하고 싶은 마음으로 하지 않고 무심으로 하는 장엄이기 때문에 극락세계(極樂世界)같은 굉장한 장엄을 합니다. 극락세계의 장엄은 뭐라고 말할 수도 없는 장엄입니다. 극락세계를 가보면 다이아몬드 나무가 있고 다이아몬드 잎이 열고 모두 금·은·칠보로서 도로가 장엄되고 팔공덕수(八功德水) 못이 있는데, 바닥에는 금·은·칠보로 된 모래가 깔리고 잔디가 있고 그 물속에 들어서면 키가 작은 사람은 작은 대로, 큰 사람이 들어서면 큰 대로 다 알맞게 물이 되고 백 명이 한 번에 들어가도 키가 작고 큰 것을 따라 모두 다 목욕하기 적당한 높이로 또 물이 찹니다. 발목쯤 닿았으면 하고 생각하는 찰나에 발목쯤으로 물이 내려가고 허리쯤 왔으면 하고 생각하면 곧 허리쯤으로 올라오는 그러한 자유신통한 연못입니다. 도로에 있는 가로수(街路樹)도 서울이나 영국 런던이나 워싱턴 뉴욕 같은 시가를 극락세계에 비하면 변소도 안 될 정도의 장엄이 경전에 쓰여 있습니다.
삼국시대 신라 고려의 문화가 그렇게 발달하고 불교의 예술이 극치(極致)에 이르렀던 것도 타방세계(他方世界)부처님세계의 굉장한 장엄을 경에서 그대로 보고 구상(構想)하고 설계를 하여 절을 짓고 탑을 조성했기 때문입니다. 절을 짓고 불상(佛像)을 조성(造成)하는 경우에도 정신을 일념으로 모아서 무심한 경지에서 했기 때문에 석굴암(石窟庵)같은 위대한 예술품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금강경 주제(主題)로 되어 있는 운하주(云何住)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에 대해서 「마음을 어디다 두며 마음을 어떻게 먹으며」,「번뇌와 망상을 어떻게 항복받으며」하는 말씀인데, 마음을 어디다 둔다 해도 틀린 말이고 마음을 어떻게 먹는다 해도 틀린 말이고 마음을 가진다 해도 틀린 말입니다. 마음은 마음이지 그걸 두려고 하며, 가지려고 하며, 먹으려고 해서 되겠습니까? 그래서 「응무소주(應無所住)」하라 「아무데도 주하지 말라」 주한다는 생각조차 내지 마라. 아무데도 주하지 않는 그게 본래 주이고 또 본래의 그 자리에 주하라 그런 말입니다. 내 본심자리는 생각을 내면 틀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중생들은 망상이 죽 끓듯이 끊으니까 일체 만상(萬像)에 색신(色身)이니 성향미촉법(聲香味觸法)에 전부 주하고 의지해 가지고 집에 주하고 남편한테 주하고 아들딸한테 의지하여 모두 거기에 주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망상을 다 항복 받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강경 전체의 대의(大意)입니다.
이 망상을 항복받는 게 불교공부인데 산중(山中)의 절에 있으면 요 근래까지도 그런 실례를 많이 들었습니다. 공부하다가 흔히 노루나 토끼가 와서 도망가지 않고 옆에 와 있습니다. 나중에는 정이 들어 안 가려고 하는 정도입니다. 얼마 있다 다른 절로 가려고 하면 자꾸 따라옵니다. 그러면 사람들한테 붙들릴 거고 그래 돌멩이질을 하고 막 야단을 치고 이러면 또 눈을 끔벅끔벅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올라갑니다. 올라갔다가 자꾸 내려다보다가 그만 또 뛰어 내려옵니다. 그래 그놈 잡아가지고 온갖 설교를 해서 타이르고 「네가 여기 내려가면 잡혀서 죽으니까 너희 동무하고 놀아라」 그래도 잘 가지를 않습니다. 나중에는 할 수 없이 몽둥이로 때려 주고 돌멩이로 엉덩이를 한번 되게 때려 주면 그때는 안 옵니다. 옛말에「불탐이면 야식 금은기」(不貪 夜識金銀氣)라고 하여 탐심이 없으면 그믐밤에 금과 은의 서기가 보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해면 조간 미록유」(遠害 朝看蘪鹿遊)라고 하여 아무 해물지샘(害物之心)이 없으면 아침에 일어나 뜰에 나가도 사슴과 노루가 뜰 앞에서 자고 사람이 나와도 안 달아납니다.
이런 마음 공부하는 것이 보살장엄(菩薩莊嚴)입니다. 국토를 이렇게 장엄하여 악한 짐승도 악한 사람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집니다. 내 마음이 완전히 그렇게 청정해지면 다른 것은 다 모두 내 마음의 그림자니까 따라서 다 청정해집니다. 이렇게 공부를 자꾸 해서 응무소주하는, 주하지 않는 보리(菩提)의 마음을 깨쳐 가지고 견성(見性)해 가지고 항복기심(降伏其心)을 해서 해물지심(害物之心)이 없어지고 춘삼월(春三月)에 눈 녹아 가듯이 온갖 욕심이 사라지고 이 세상이 참말로 있는 것인 줄 알고 허덕대는 마음, 이런 마음이 자꾸 눈 녹듯 얼음 녹듯이 녹아 내려갑니다. 그래서 불성자리만 드러나서 서로 해롭게 할 그런 일이 없으니까 이 세계가 차차 극락세계가 되어 가는 겁니다. 극락세계에도 새가 있고 나무가 있지만 모두가 불보살의 화현(化現)이어서 축생 그대로가 아미타불(阿彌陀佛)이며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보현보살(普賢菩薩)이고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나 보살님들이 불토(佛土)를 장엄한다 하는 것은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것이니 그 마음에 한 점의 티도 없이 청정하므로 그 거룩한 마음의 광명이 장엄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사바세계에서 법당(法堂)에 단청(丹靑)하고 남대문에 단청하듯이 울긋불긋 오색 칠하는 게 아니고 궁전을 짓고 도로를 닦고 하는 게 아니며 오직 무심만 하면 그게 곧 장엄이고 장엄 안 하는 걸로 장엄하는 것을 장엄이라 이름하여 부를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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