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큰스님의 금강경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須陀洹 能作是念 我得須陀洹果不 須菩提言不也 世尊 何以故 須陀洹 名爲入流 而無所入 不入色聲香味觸法 是名須陀洹

如明 2015. 11. 17. 07:43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須陀洹 能作是念 我得須陀洹果不 須菩提言不也 世尊 何以故 須陀洹 名爲入流 而無所入 不入色聲香味觸法 是名須陀洹

[解 義]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네 뜻에는 어떠하냐? 네 마음에 어떻게 생각이 드느냐?』 그런 뜻입니다.

『수다원(須陀洹)이 능작시념(能作是念)하되, <수다원>이 이런 생각을 하겠느냐? 다음과 같이 마음을 먹겠느냐? 「내가 이제 <수다원과>를 얻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겠느냐? 안하겠느냐?』 부처님께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이에 수보리존자 말씀이 『아니옵니다. 부처님, 어째서 그러냐 하오면 수다원은 「흐름에 들어간다」는 말이온데 색·성·향·미·촉·법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것을 <수다원>이라 했기 때문이옵니다.』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수다원>이란 본래 인도 말이지만 그 뜻은 흐름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곧 본문에 입류(入流)했다고 하는 유(流)란 말은 성류(聖流)라는 말이니 성인의 세계에 들어섰다는 말입니다. 범부가 아니고 이제부터는 성인이 됐다는 뜻입니다. 소승불교의 계급에 四급이 있는데, 학교에 일학년, 이학년 올라가서 사학년이면 졸업하는 것과 같은데, <수다원>은 소승불교 일학년에 입학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학년인 <사다함>에 진급하려면 마음 가운데 일체의 색 ·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걸리지 말아서 진리니 비진리니 외도니 사도니 정도니 불법이니 하는 그런 망상이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정도가 깊지 못하고 도(道)가 얕기 때문에 초과(初果)라 한 것입니다. 맨 처음으로 번뇌망상이 쉬고 조용해져서 해탈했기 때문에 성류(聖流)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여지껏 산 보고 높다 물 보고 깊다 이렇게 생각하고 소학교에서 대학 졸업하기까지 배운 온갖 것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고 살다가 부처님 덕분에 구공에 대한 법문을 듣고 보니까 참말로 그게 가질 바 참된 지식이 아니란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차차 깨닫는 것은 소승사상만 그런 게 아니고 대승들도 처음에는 깊이 한꺼번에 깨닫는 수도 있지만 조금씩 깨달아 가지고 마지막에는 부처를 이루는 수도 있고 두번 세번 열번 깨닫는 수도 있습니다. 이 소승불교의 초과인 수다원과는 성인의 류에 들어갔다하는 것이니 마음이 해탈이 되고 조용하고 번뇌가 없어졌으니 성류에 들어선 것인데, 그렇지만 사실은 들어간 것이 없습니다(而無所入). 그러면 이게 또 무슨 뜻입니까? 들어갔으면 들어간 것이고 안 들어갔으면 안 들어간 것이지 들어갔는데 들어간 것 없다 그러니 말이 안 됩니다. 산 보고 높다, 물 보고 깊다, 이건 남자다 저건 여자다, 또 학교 가서 선생님 말 배우고 이론이나 지식 익혀서 참 그게 복잡했는데 인제 불교 정법을 듣고나서 그걸 다 해탈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남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 산을 보든 물을 보든 마음자리만 남았으니 인제 그자리 그대로 산 본 자리고 물 보든 생명 그대로이며 그 생명 그 마음자리 그게 어디 나가고 들어간 것도 아닙니다. 그 마음 그대로 조용해진 것뿐이니 어디 들어선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항상 주관 객관 이런 저런 관념으로 진리라는 게 저 하늘나라 높은데 저 고원 어디에 있는 것으로 여기고 객관적인 진리가 있는 걸로 알아 왔습니다. 그래서 이 약하고 얼마 안 되는 무능한 존재가 사람이라는 인식으로 삽니다. 내가 그동안 애가 타도록 벌써 여러날 불법을 얘기해 줘도 항상 집에 갈 때는 무엇을 깨쳐 가지고 들어가는 그런 관념을 가집니다. 그러니 이런 관념을 떼는 게 불법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본성이 아니고 항상 그대로입니다.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아는 그것입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쉬어서 그것을 먹어도 좋고 안 먹어도 좋고 기어코 먹을 것도 아닌 걸 안 것입니다. 그래서 수보리존자께서 대답하시기를, 「수다원이 성인의 종류에 들어갔다고 하지만 들어간 데는 없사옵니다(須陀洹 名爲入流 而無所入)」라고 여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현상계, 곧 남자나 여자나 산하대지(山河大地) 어디에도 내 몸뚱이에도 이끌리지 않는 것이 성현의 마음입니다. 산보고 좋다 싫다는 생각 안 내는 것이 그것이 색(色)에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산 보고 좋다 궂다 하든지 남녀간에 보고 좋다 궂다 하면 벌써 <색>의 현상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색(色)이라 함은 여색(女色)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세계에서 유명한 성악가가 왔는데 노래를 아주 잘 부르니 이 기회에 한번 들어보자 하더라도 들어 볼 생각 없습니다. 또 들어 봐도 좋다고 생각하면 좋고 돼지 목 따는 소리 같다고 생각하면 이것저것 다 내 버리어 번뇌가 아주 없는 수다원은 어떤 목소리를 들어도 아무 생각 없이 듣습니다. 법문하는 소리로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차라리 아무 생각 없이 들으면 하나도 안 들립니다. 그러므로 수다원 같은 성인은 소리 따라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不入聲).

또 좋은 향내가 난다 해도 향 한 대 더 피우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없습니다. 좋은 향내도 나쁘다고 생각하면 나쁜 것입니다. 좋고 나쁘고는 나의 망상이지 듣기 싫어집니다. 돼지 목따는 소리도 「참 불쌍하구나. 죽느라고 저렇게 애를 쓰는구나.」하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야, 저 놈 죽느라고 노래 한 곡 잘 뽑고 죽는구나.」하고 돼지의 마지막 노래로 들을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좋다 하면 좋고 나쁘다고 생각하면 나쁜 것이니, 목소리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마음속에 있는 향내와 향내를 맡을 줄 아는 주체인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향내는 냄새가 좋다는 관념이 있을 뿐입니다. 생각이 끊어져서 마음이 삼매에 들어 일념이 되면 똥을 코에 발라도 구린내가 안나고 방안에 향내를 꽉 채워도 향기가 안 납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냄새 같은 객관에 끄달리지 않습니다(不入香).

「어느 식당에 가면 설렁탕 맛이 참 좋다는데 거기 가서 막걸리나 한잔 사 먹어야겠다.」 이런 생각을 안 합니다. 온갖 음식에 생각이 없습니다. 하루 밥 세끼 죽지 못해 먹는 것인데 하루 한끼 먹는 사람도 있는데 난 하루 두끼만 먹자. 이런 식으로 자꾸 육체생활을 줄여들어 갑니다. 그러면 「어디 술집이 새로 생겼는데 술맛이 좋다더라.」하는 류의 소리는 바람소리에 물소리처럼 지나갑니다. 몸뚱이도 세계도 꿈인데 꿈속에 들어가 무엇이 존재하겠는가. 그리고 어느 몸뚱이가 있어 마르고 축나겠느냐? 이렇게 닦아 들어가는 것이 불법입니다(不入味).

남녀간의 이성끼리 만나더라도 생각이 안정되지 않은 범부는 가슴이 설레고 번뇌가 일어나서 들끓습니다. 그러니 설사 이성을 만나더라도 저건 남자거니 여자거니 생각하지 말고 저건 하나의 껍데기다, 바지 껍데기고 육체의 껍데기, 그림자로 봐야 합니다. 똥주머니·오줌·피 ·코·가래의 주머니로 봐야 합니다. 번뇌를 여의고 마음만 오롯하게 드러난 성인의 경지에선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육체에 대한 일체의 애착이 없어지고 온갖 사상 관념이 없어집니다(不入觸).

유교의 교리는 어떻고 예수교의 가르침·철학의 논리·과학의 원리 이 모든 것을 불교에서 법(法)이라고 그럽니다. 모든 이론·종교·학문이 다 법이고 불법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모든 법을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에 망상이 없으면 불법까지도 따로 지킬 것이 없습니다. 팔만대장경이 모두 다 망상이니 하지 말라는 소리인데, 자아를 완성하여 번뇌를 여의였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한 주인공이 되어 생사를 초월하고 의식주도 필요 없고 영원히 아무 근심 걱정 없는 사람이 되고 나서야 남을 제도한다는 것도 말이 됩니다. 이런 경지에 도달하고서야 오직 남을 위해서만 몸이 닳아 없어지도록 농사도 지어 주고 장사하는 집에 가서는 장사하는 일 거들어 주고 설렁탕집에 가면 설렁탕 나누어 주고 하루 종일 남을 위해서 고된 줄도 모르고 봉사할 수 있고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객관세계에 끄달림 없이 번뇌 망상 다 초월해서 몸뚱이도 없고 생명에까지도 조금도 끄달려 들어가지 않는데 거기에 무슨 법이 필요하고 어떤 진리, 어떤 원리가 필요합니까? 이것을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수다원은 그 마음이 무아가 되었기 때문인데, 그래서 망상이 끊어진 경계에 들어섰지만 그 깊이가 아직은 얕습니다. 마치 학교 교육에 비교해 말하자면 국민학교는 졸업했다는 정도에 해당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의 三과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이무소입 불입색성향미촉법(而無所入 不入色聲香味觸法)을 새기는데 있어서 잘못 새기면 「들어감이 없으므로 색성향미촉법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새기어 말을 두동강이를 만듭니다. 이것을 「자기 마음을 깨달은 것이고 어디 들어선 것이 없다.」는 뜻으로 <이무소입(而無所入)>이라 했고 그렇다고 해서 객관의 대천세계(大千世界)에 어디에 들어갔느냐 하면 거기도 들어간 것이 없다는 뜻으로 <불입색성향미촉법>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달으면 어디로 들어서는 것이 아니니, 안으로나 밖으로나 들어가고 나가는 것이 없다는 뜻으로 한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