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큰스님의 금강경

둥근 것도 모난 것도 아니다.

如明 2015. 11. 14. 07:27

둥근 것도 모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금강경 전체를 남을 위해 말해 주면 더욱 좋지만 사구게 16글자만이라도 남을 위해서 설명해 주는 것은 우주의 핵심인 마음, 만사의 주체인 진짜 나를 발견하게 해 주는 것이므로 그 공덕은 십억 세계에 가득찬 보배를 가지고 온 중생을 잘 살게 해 준 복덕보다도 몇 천만배 큰 것이라고 합니다. 물질로 보시해서 얻는 복은 그 과보도 역시 물질로 받고 몸으로 받는 중생의 과보일 뿐, 복덕 지을 수 있는 주체, 주인공을 찾는 복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깨치는 일은 주인이 되는 일이고 영원불멸하는 절대자가 되는 것이지만 객관에 끌리고 몸뚱이로 사는 것은 종이 되는 것이고 생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인지를 모르면 제 정신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노름꾼 만나면 노름장이가 되고 술꾼 만나면 술꾼이 되고 아편장이 만나면 아편장이 되고 도둑놈 만나면 도둑놈 되고 깡패 만나면 깡패 되어 온갖 곳으로 다 끌려 다니며 마음에도 없는 일을 시키는 대로 종노릇 하느라고 온갖 고생을 합니다. 그러니 자기를 아는 사람, 마음을 깨쳐 주객을 초월하여 부처를 안 사람은 누구를 따라 가더라도 거기 따라가서 나한테나 남한테나 이익이 되면 따라 가지만 이익이 안되면 안갑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들 따라다니면 덕 될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이란 몸뚱이를 나라고 속아 살기 때문에 어떤 것이 나에게 정말 이익이 되는지도 모릅니다. 금강경의 사구게 스무자를 일러주는 것은 곧 영원히 행복한 행복의 모체, 주체를 밝혀 주는 것이지만, 물질로 복을 짓는 것은 아무리 크게 했다 하더라도 하나의 부분밖에 안됩니다. 사구게는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도 있고, 이 금강경 맨끝에 가면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이란 게송도 있습니다.

또 제 26장에 가면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란 게송도 있고 금강경 어느 구절에도 네 글귀의 내용이 다 있습니다. 물질로 많이 보시하는 것은 아무리 잘 해도 종을 호강시켜 주는 폭 밖에 안 되고 사구게를 잘 일러 주는 것은 수많은 종의 주인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이 되는 마음을 깨우쳐 준 것이므로 그 공덕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에 모든 부처님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다 이경에서 나온다고 한 것입니다.

이 마음은 둥근 것도 모난 것도 아니고 얻은 것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며 어떻다고 결정된 내용이 있거나 어떤 개념으로도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불법은 곧 불법이 아니다.」고 하셨던 것인데, 그러면 그 속뜻이 무엇인가. 강의를 안 들으면 칠판도 글씨도 아무것도 아닌 셈이고 아무런 뜻이 없으니, 팔만대장경도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경을 일러 보고 거기서 조금 알았다고 해서 어떤 소견을 내면 그러다간 나도 속고 남도 속이는 것입니다. 장님한테 장님이 끌려가는 것과 한 가지여서 나중에는 둘이 다 구렁에 빠지게 된다는 겁니다. 「소위 불법이란 참말로 불법이 아니라, 그런 게 불법이다. 불법이라고 이름 지을 수 없는 게 불법이다(所謂佛法 卽非佛法)」의 뜻은 글자 음성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마음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설명하는 이 마음자리를 자꾸 생각하면 깨달아지는 때가 있습니다. 밥 먹다가 깨닫거나 변비로 애쓰다가 대변보는데 툭 터집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물으시고 수보리는 또 이렇게 대답하셨는데 그러면 그 논리가 어디로 들어맞는가. 그것을 자꾸 생각해 보면 탁 깨칩니다. 이 문자와 인연이 없어서 여기서 깨치지 못하면 더 뒤에서 깨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금강경 보고 못 깨치면 유마경(維摩經)보고 깨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깨치는 것도 여러 가지입니다. 「오직 이 법문을 설명할 줄 알고 들을 줄 아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이 인생의 가장 근본 문제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대답이 안 됩니다. 동서 오천년 문화를 다 듣고 나서 설명을 한다 하더라도 어떤 학문으로라도 이것은 설명이 안됩니다.

부산에 혜월(慧月)스님이라고 하는 큰 도인(道人)이 계셨습니다. 이 어른은 일자무식(一字無識)인데 선지식(善知識) 가운데도 한국 최근세(最近世)에서는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동네 어린 아이들처럼 순진하게 어린애 양을 합니다. 당시에 어떤 목사(牧師) 한 사람이 혜월스님이 불법을 잘 아는 선지식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어떤 것이 불교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혜월 노장스님은 「선생님」하고 부릅니다. 「예」하고 대답하니 「저 샘에 가서 물 한 그릇만 떠다 주시오.」 그래서 목사는 할 수 없이 노장님 시키는 대로 물을 한 그릇 떠다 드렸습니다. 그러니 노장님은 「그게 불법입니다.」하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목사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목사가 과거세에 불연(佛緣)이 깊은 아주 수승(殊勝)한 선근(善根)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아주 깨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목사로서는 수수께끼도 아니고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싱겁기만 했습니다. 이론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이나 떠 오라고 해 놓고는 불법 설명을 다 했다고 하니 그 스님이 무심해서 그런 것인가 어떤 것인가 하고 물러났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이 고래(古來)로 수백 가지 수천가지가 됩니다만 대개가 다 이 혜월스님이 보이신 것과 비슷했고 그때그때 경우에 따라서 방법이 다른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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