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큰스님의 금강경

무위법(無爲法)에도 차별 있다

如明 2015. 10. 30. 08:12

무위법(無爲法)에도 차별 있다

육체를 가지고 <나>라 하는 뿌리가 박혀서 범부는 이것 때문에 고해(苦海)를 헤매고 돌아다니는 겁니다. 개나 돼지 그게 나라고 하여 남을 다 죽입니다. 육체가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 생명 다 죽이고라도 나는 살려고 덤비는 겁니다. 육체를 나라고 생각하는 여기서 온갖 생각을 다 내는 겁니다. 박사가 되어봤자 결국은 밥 한 그릇 잘 얻어먹자는 것 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까 상이상학(相而上學)에서부터 곧 생각을 초월하는 거기서부터 현성(賢聖)의 지위는 시작되는데 52위나 올라가야 합니다. 세상에 아무 할 일없다는 노자(老子)도 52위의 어느 정도까지 갔느냐, 우리가 볼 때 그의 도덕경 같은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12위까지 겨우 올라간 것으로 보입니다. 공자(孔子)는 그 가르침이 조리가 있긴 하지만 그러나 사서삼경의 내용으로 보아 무위법(無爲法)을 깨달은 깊이가 보살의 52위설(位說)에 대조해 보면 노자의 경우보다 못한 것으로 판명됩니다. 또 유교에서는 「인간 성품이 본래는 착하다고 하고 본래 착한 것인데 공연히 너희가 악에 젖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품이 본래 선 같으면 근본 성품이 선인데 악한 생각이 어디서 나올 수 있습니까?」 그것은 어설픈 얘기가 됩니다.

불교의 상이상학(相而上學)이란 보고 듣고 삼천대천세계 천당 지옥 돌아다니고 하는 거 모두를 말합니다. 이것을 초월한 경지에 들어가야 상이상학이 되니 불교는 세상학문이나 종교와 너무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겨우 영혼의 세계가 있겠다, 4차원의 세계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아무 생각 없는 세계, 거기 들어서서도 크게 52차원의 세계를 나눕니다. 잠재의식이 차츰 진보해 가는 과정입니다. 52위의 처음에 들어선 것은 무(無), 곧 아무 생각 없는 데 곧 현상계가 없는 데 들어선 것, 아무 것도 할일 없는 데 이른 것입니다. 그 실력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