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된 법은 뗏목도 못된다.
내가 처음 도선사에 들어가니 종래에 다니던 신도가 약 칠백 세대쯤 되었는데 모두 다 조상 때부터 이 절에 다녔기 때문에 다니는 것뿐 불교의 뜻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미신적으로 다니는 신도들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도선사에 기도를 해서 아들을 낳았다든지, 산신각에 기도를 해서 복을 받았다든지 자손에 대한 소원을 빌어서 성취했다든지 하는 이들이고 부모의 유언에 따라서 다닌다든지 하는 무당불교에 가까운 신도들이었습니다.
신라 고려 때에는 스님들이 사회의 지도자로서 일반 국민의 불교에 대한 신앙과 교양도 높았으며 국가 사회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왔으니, 불교의 지위와 교통이 거룩했지만, 조선 때에 와서는 죽일 것을 사정 봐서 살려두는 정도의 극한적인 배불정책(排佛政策)으로 말미암아 중은 식은 밥이나 얻어먹는 불교로 되었습니다. 신도들이나 스님이나 수준이 극히 낮아져서 여신도들은 부처님께서 복 준다니 복 좀 타 오려고 절에 가고 스님을 무당 취급해서 그 풍습이 해방 후에까지도 그런 정도였습니다. 쌀 외에는 돈 백원 가지고 와서 아랫목 차지해 가지고 스님들 보고 밥해 오라고 상심부름이나 시키는 불교로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한국불교는 신도정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나는 도선사에 가면서 먼저 「점도 치지 말라. 사주도 보지 말라. 절에 온다고 택일도 하지 말라. 부처님께서는 사시공양을 하셨으니 불공도 다른 때는 하지 말고 공동으로 함께 하라. 부처님께서 굶어 돌아가신 분 아니니 밥만 자꾸 때 없이 해서 올릴 것이 아니라 제가끔 일심으로 마음으로 참회하라.」고 하며 미신적인 짓을 하지 말라고 했더니 그 칠백세대가 다 떨어져 나가고 한 사람도 안 왔습니다. 그래서 마을에 내려가서 밥을 얻어먹는 정도로 되었는데 요즘은 전혀 새로운 신도들이 일만 칠천 세대로 늘어났고 매월 오백 세대씩 늡니다. 나는 그 뒤에 산신각까지 헐고 신도들의 그릇된 신앙, 곧 비법(非法)을 고쳐 주기 위해 올바른 신앙을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했고 마음을 깨쳐 생사고뇌를 벗어나야 한다는 불법을 말해 주었고, 마음을 깨치고 나면 부처님의 법문까지도 다 버려야 하는데, 미신·그릇된 법·법 아닌 법을 버려야 한다고 얘기한 보람이 있은 것입니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그 시간부터 죽음의 적에 쫒기고 있습니다. 사람은 개구리이고 죽음은 구렁이입니다. 낮이면 낮, 밤이면 밤마다 찰나도 쉬지 못하고 죽음이란 구렁이에게 쫒깁니다. 자는 시간까지는 죽음의 구렁이에게 쫒기는 개구리의 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 중생들의 생입니다. 그것도 한번 죽고 그치는 죽음이 아니고 천당·지옥·축생으로 내생에도 무량겁을 쫒기고 죽고 합니다. 마음을 깨쳐서 육신은 내가 아닌 것을 확인해야 죽음의 쫓김을 면합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을 깨치면 모든 근심을 여의고 어떤 법에도 걸리지 않습니다. 정법(正法)은 물론 사법(邪法)의 구애를 벗어납니다. 강을 건너서 뗏목을 버리듯 모든 것 다 버리고 사상(四相)이 떨어져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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