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說 義]
중생은 죽기 싫어한다.
모든 사람에게 가장 귀중한 것이 뭐냐고 물으면 누구나 다 서슴지 않고 생명이라고 대답합니다.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이 우주를 다 준다 해도 자기 생명과는 바꿔 주지 않을 것은 물론이며 생명은 손톱만큼도 안 떼어 줍니다. 그렇게 소중한 것이 생명이지만 그 생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이 안 나옵니다. 요새 무슨 가치, 가치(價値)하고 떠들지만 우리의 생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사람의 참 다운 가치를 논 합니까? 속담에 “살기 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하지만 만일 먹으면 죽인다고 총을 갖다 대면 아무리 먹고 싶은 진수성찬이 있어도 먹을 마음을 내지 못 합니다. 먹는 것은 오직 살기 위한 수단입니다. 농사를 하든가 장사를 하든가 정치를, 철학을, 과학을 하는 것은 다 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입니다. 아무리 농사를 짓기 싫다 하더라도 부득이 농사를 지어야 하겠고, 부득이 장사를 해야겠고, 부득이 정치인이 되고 경제인이 되고 하는 것은 삶의 목적을 위한 수단입니다. 그런데 이 산다는 말은 “누가,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살려고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내>가 살아야 합니다. 내가 사는 것으로 살아야 만족한 것입니다.
현대인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내가 무어냐?” 제일 중요한 이 두 가지를 확실히 모르고 삽니다. 그러니 아무 것도 아닌 셈입니다.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좋지만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이 생명을 어떻게 어디에 바쳐야 할 것인가.”가 있어야 하고 확실히 내가 있는데 나는 무엇인가. 이것이 제일 큰 선결문제(先決問題)입니다. 다른 것은 다 아나마나입니다. 알아 보았자 별수 없고 철학박사 돼 보았자 별수 없습니다. 먹고 똥 싸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똑같습니다. 착하다고 더 나은 것도 아니고 악하다고 더 못한 것도 아니고 미련하다고 더 못한 것도 아니고 먹고 똥 싸고 늙고 병들고 죽고 하기는 똑 같습니다. 누가 그걸 조작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되도록 되었을 따름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경전(經典)입니다. 석가여래(釋迦如來)는 49년 동안을 꼭 이 문제를 다루었고 글자 한 자도 딴 목적을 가르쳐 보이신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철학이니 과학이니 뭐니 해 보아도 깊은 내용을 파 보면 속이 비어 있습니다. 아무 내용도 없는 걸 껍데기로 싸 가지고 있는 것이 보자기로 똥 싸놓은 것과 같습니다. 파초(芭蕉)대를 까보면 꼭 그 안에 기둥이 있을 것 같은데 껍데기뿐이지 알맹이도 기둥도 없습니다. 모든 학문은 그 근원(根源)을 캐고 보면 파초 껍데기 까놓은 거나 한가집니다. 그것은 부처님에게서와 같이 “무엇 때문에 사느냐? 누가 사느냐?”하는 이 문제가 해결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팔만대장경 어느 한 글자도 이 문제를 떠나서 이야기된 글자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남자나 여자나 노인이나 어린애들이나 모두 제 잘난 멋에 삽니다. 만약에 내가 못 생겼다고 확실하게 확정만 되면 너도 나도 자살하는 사람 많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없는 데 가서 제 혼자지만 저 잘난 멋으로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네가 무엇인데 그렇게 잘났단 말이냐?”하고 물으면 얼른 대답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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