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큰스님의 금강경

原 文 : 一時佛

如明 2015. 7. 26. 02:20

原 文 : 一時佛

[解 義] “불법은 역사가 없다. 역사를 무시한다.”고 흔히 말합니다. 실제로 불교 사상이 그런 경향이 있고 경에도 그렇게 되어 있기도 합니다. 한 평생 내가 걸어온 것을 기억할 필요가 없으며 구태여 사람 이름도 기억하려 하지 않고 장소도 사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애착해 보았자 마음공부에 도움이 안 되는 까닭입니다. 박 누구라고 하지만 참말로 그런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니 역사성을 전연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불교 수행에 있어서는 장점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역사적인 고찰을 한다든지 할 때에는 불편이 많습니다. 그래서 경전에도 일시(一時)에 어느 때, 각설 이 때 그런 식으로 돼있고 아무 날 아무 시라고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있습니다. 첫째, 시간은 없는 거다. “서기 몇 해다 불기 얼마다 해 봤자 그것은 어림없고 말도 안 된다. 왜냐하면 시간은 그 자체가 본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중생 따라 시간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천당이 스물여덟 하늘이나 되는데 맨 아래 천당인 사왕천(四王天)의 하루가 우리 인간의 오십년이 되고 도리천(忉利天)에 올라가면 그 하늘 일주야가 우리의 백년이나 되며, 또 더 올라가면 우리 이백년·사백년이 거기 하루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역사적인 시간을 말해봤자 천당사람에게는 안 맞으며 또 다른 세계에도 역시 시간이 맞지 않습니다. 한국의 열시는 유럽에서는 밤 한 시가 되고 인도의 아침 열시는 미국에서는 역시 밤이 될 것입니다. 또 달나라의 시간이 다르고 하루의 시간도 다릅니다. 자전(自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달나라의 일 년, 수성(水星), 금성(金星)의 일 년은 지구의 일 년과 크게 다릅니다. 이와 같이 중생의 세계가 다 시간이 다르므로 완전한 시간을 말할 수 없습니다. 불교는 인간계뿐만 아니라 전 중생계(衆生界)를 구제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셋째, 불타(佛陀)의 경지에서는 시간 공간을 초월했기 때문에 인간 세상의 시간 개념에 얽매이는 것은 경답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옛날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나무꾼이 산에 나무하러 올라가서 나무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노인들이 바위 위에 앉아서 바둑을 두는 것을 보았습니다. 노인들은 수염을 날리면서 얼굴이 하도 잘 생겼을 뿐 아니라 신선 같은 거룩한 풍채에 마음이 끌린 나무꾼은 정신을 잃고 영감들을 쳐다보는 동안에 바둑 한 판이 다 지났습니다. 그래 너무 시간을 지체했다 생각한 나무꾼은 자기 지게 있는 데로 가보니 그 동안 벌써 몇 백 년이 지나갔는지 지게도 없어지고 도끼 자루도 다 섞어서 조금만 남았더라는 옛날이야기가 있습니다.

꿈에 한 이십년 삼십년 사는 때가 있습니다. 아들 딸 다섯 여섯 낳고 온갖 사업을 다 하고 한국 갑부가 되어 자가용을 여나무대 놓고 밤이나 낮이나 재미나게 호강을 하면서 살았는데 깨고 보면 꿈입니다. 그래서 깨어서 시계를 보면 일분도 안 되었는데 꿈에 들어가서는 이십 년의 생활이 지난 것입니다.

이렇게 꿈에 들어가 몇 십 년을 살았다는 것도 우리의 한낱 생각일 뿐 사실 이십년이 아니며 손목시계가 일초가 안 됐다고 하는 것도 우리 생각 일뿐 역시 일초는 아닙니다. 일초란 생각 그것이 꿈에 이십년이란 생각으로 된 것이며 아들 딸 낳고 살림 산 것도 내 생각이 그렇게 나타나 보인 것뿐입니다.

꿈이 우리의 생각으로 부터 창조된 것이듯 시간과 공간은 우주와 인생의 근본인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벌어진 현상이며 그 실상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공(時空)을 완전히 초월한 부처님 세계에서는 반드시 어느 나라 몇 년 갑자년 을축년 등을 기록 하는 것이 오히려 부처님 법답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들었노라. 한때 어느 때...] 그렇게만 기록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