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큰스님의 금강경

[說 義]

如明 2016. 5. 6. 09:34

[說 義]

 

현상계의 모든 것이 환인 줄을 확실히 알면 현실에 구애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통조화를 부리게 되지만 그런 걸 모르는 사람은 제 마음으로 주위 환경을 만들어 가지고 구속이 되고 속는데 사실은 속는 것도 아닙니다. 밥 먹고 물 긷고 산에 가서 나무하고 장사하고 농사짓고 하는 것이 모두 신통묘유(神通妙有)입니다.

그러므로 있다 하면 용(用)이고 없다 하면 체(體)이고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 하면 체와 용을 초월한 것이며, 「이렇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그런 것을 체와 용이라 이름 할 뿐이다.」하면 체와 용을 겸한 것이 되는데 이것이 불교의 사구(四句)가 됩니다. 이것을 현상계의 삼라만상은 있는 것이 공해서 없는 것이 아니라는 소견을 제일구(句)의 유문(有門)이라 하고, 모든 것은 그 근본을 자세히 따지고 보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공이라고 보는 것을 제 이구의 공문(空門)이라 하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면 제 삼구인 역유역공문(亦有亦空門)이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 제사구의 비유비공문(非有非空門)이라 그럽니다.

나쁘다고 보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사람은 반드시 좋다고 보는 사람이 있는데 또 한 사람은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반합(正反合)의 서양 논리로는 이렇게 긍정 부정해서 그 양자를 종합해서 진보하는 정반합의 법칙으로 끝나지만 불교에서는 하나가 더 있습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이론이 다 끝난 것 같지만 하나 더해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그래야 마지막 이론이 끝납니다. 그러니 이것으로 보더라도 정반합의 변증법적 논리보다 불교의 사구논법이 훨씬 완전한 논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천문학이나 자연과학이나 모든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도 이 사구의 이론으로 하면 더욱 완전하게 더욱 빨리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서 활용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사구에 사구백비(四句百非)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까지가 아니다, 곧 온갖 것 온갖 이치를 다 부정하여 어떠한 존재나 이론, 원리 무엇이든지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백비라 한 것이고 사구 자체에 이미 백 가지로 부정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뜻으로 사구백비라 한 것입니다. 사구로 네 번 부정하는 것만 가지고는 만족할 수 없어서 백비란 말을 붙였지만 사실은 사구 가운데 이미 백비의 원리가 다 들어있는데 그 뜻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풀이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처음에 있다 하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는 부정으로 봐서 제일비(非)가 되고 다음에 없다 하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란 <제이비>입니다.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제삼비>가 되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말은 <제사비>가 됩니다. 그런데 또 중생들이 이 사구의 논법에 집착해서 사구의 본래 뜻을 바로 깨달을 줄은 모르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그것만을 주장하니까 그런 주장을 부정하는 제 오비가 나오게 됩니다, 마치 아인슈타인이 물질의 본질은 에너지도 아니라고 했듯이 물질의 본질을 원소라고 하지만 원소의 근본체는 무엇이냐 하는 것이 연구돼야 하고 원자, 전자라고 하더라도 역시 원자, 전자를 이루는 본질이 또 있어야 하기 때문에 끈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반합을 부정하고 사구를 부정하고 거기다 다시 아니 비(非)자를 하나 더 붙이면 긍정이 되는데 다시 또 비(非)자를 붙이면 부정이 됩니다. 이렇게 비차를 천자, 만 자 지구를 몇 바퀴 돌 수 있는 비자를 붙여서 사고·관념을 초월하자는 궁극적인 듯을 밝히려는 목적으로 백비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말하는 이 자리, 산보고 높은 줄 아는 이 자리는 사구로도 설명될 수 없고 백구(百句)로도 안 됩니다. 말을 붙이면 붙이는 대로 모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작다고 하면 바늘로 찌를 수도 없이 작고 몇 천만 억 배로 확대해 볼 수 있는 현미경으로도 살펴 볼 수 없는 자리입니다. 또 크다고 할 때는 몇 천만 억 배의 우주를 제망중중 무한대 수로도 비교할 수 없이 마지막으로 큰 이 마음자리는 작으면 작은 대로 큰 거고, 크면 큰 대로 작은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 무엇이 가고 올 것이 있겠느냐는 겁니다. 천 백억 화신을 나타내서 천 백억 세계에 부처님의 몸을 한 분씩 나누어 중생들을 모두 제도했지만 오고 간 것이 아닙니다. 소승경전만 잘못 본 사람은 실달태자가 이 세상에 실제로 오셔서 팔상성도(八相成道)하셨고 79세에 진지를 잘못 잡수시고 혹은 돼지고기 잡수시고 잘못되어 돌아가신 것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승경의 도리를 아는 이 부처님의 참 모습, 마음자리를 아는 이는 부처님께서 몸뚱이로 이 세상에 출현하셨지만 온 것이 아니고 가셨어도 간 것이 아닌 줄로 압니다.

그러므로 금강경의 지혜, 대승의 지혜로 볼 때는 신이 나타나고 하느님이 나타나는 것이 다 도깨비이고 설사 시방제불이 나타났다 해도 다 도깨비들이 나타난 것밖에 안됩니다. 상(相)으로 나타난 그것을 참으로 있는 것으로 보면 속는 것이고 견성성불과는 천리만리 떨어진 것입니다. 하물며 부처님께서 오시고 가시고 앉고 눕고 하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부처님의 육신상을 보고 하는 말이므로 참 부처를 본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