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큰스님의 금강경

原 文 : 世尊 若復有人 得聞是經 信心淸淨 卽生實相 當知是人 成就第一希有功德 世尊 是實相者 卽是非相 是故 如來說名實相

如明 2016. 1. 7. 08:26

原 文 : 世尊 若復有人 得聞是經 信心淸淨 卽生實相 當知是人 成就第一希有功德 世尊 是實相者 卽是非相 是故 如來說名實相

[解 義] 『세존이시여!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있어서 이 경전을 얻어 듣고서 신심(信心)이 청정하면「틀림없이 그렇겠다. 꼭 그와 같이 해야 겠구나. 사실 그런 게 있다. 내가 그런 존재다. 이 말하는 게 바로 그것이로구나. 내가 듣고 앉아 있는 이 마음자리가 부처님과 조금도 손색이 없는 자리겠구나. 단지 현상계를 보고 좋으니 나쁘니 하고 집착하는 그것이 허물이구나. 그러니 일체 생각만 내 버리면 되겠구나.」하는 실다운 상이 생길 것이옵니다. 이렇게 생각해 가지고 마음이 청정해져서 나중에는「아아 이것도 틀렸구나.」하고 차근차근 밤 껍데기 벗기듯이 한겹 두겹 벗겨 들어갑니다. 밤 껍질 자꾸 깍다 보면 재미가 나서 나중에 밤도 어디로 가고 없어지도록 깎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영락없이 부처입니다. 그래서 신심이 청정하면 곧 실상(實相)이 나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야 참말로 철저하다는 말도 되고 때 없는 신심이니까 아무 것도 붙은 게 없는 것, 티 없는 옥과 같이 되어 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즉 실상(實相)입니다. 곧 그 자리에서 그 사람한테는 실상자리가 생길 것이니, 실상자리만 남아서 즉견여래(卽見如來)하면 여래를 보고 곧 부처가 될 겁니다.

『마땅히 제일 가는 마지막 최후위 참 희유한 공덕을 성취하는 사람인 줄 알겠나이다. 그 법문을 이렇게 듣고 그 자리에서 실천해 가지고 실상자리까지 체득해 버리니 참 맹렬한 사람이오며 아주 약고 영리한 사람이옵니다.』 그러십니다.

『세존이시여! 그렇지만 이 실상이라는 것도 상이 아니고 있는 것이 아니오니 이름이 붙을 수 없는 자리이므로 그렇기 때문에 세존께서 실상이라 이름하셨아옵니다.』(實相者 卽是非相 是故 如來說名實相)

수보리존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의 조리가 논리에 맞는지 안 맞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실상이라고 하는 것은 온갖 것 다 정리해 버리고 즉견여래(卽見如來)한 자리입니다. 신심이 청정한 그 자리, 앉은 자리에서 얻어 낸 그 실상이라는 것을 무엇이든 얻은 것이 있다고 잘못 알까 염려하여 이렇게 또 그 잘못된 생각 . 덧붙이기 생각 . 가질 거 있는 것으로 아는 그걸 떼려고 하신 겁니다. 사실 그 이름을 실상이라고 했지마는 그것을 실상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실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객관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객관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사실 그것이 실상이 아닙니다. 실상이라고 하는 인식을 일으키면 벌써 인식하는 주관이 있고 인식된 객관이 있어야 하므로 그것은 실상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게 실상도 아니고 실상이 아닌 것도 아니므로 그래서 이름을 실상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정리해서 번뇌 망상을 해탈하면 실상이 현전(現前)한다, 견성한다.』 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품이 다 드러나면 사실 그것은 성품자리도 아닙니다. 성품자리라고 하는 것은 견성하기 전에 내가 말하는 그 근본자리인데 모르는 사람이 하는 소리지 아는 사람한테는 그것을 성품이라 하면 야단 벼락을 맞을 소리입니다. 그러니 일반적인 논리로는 「이것이 성품이 아닙니다. 성품이 아닌 것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해서 실상이라고 설명할 수도 없는 겁니다.」 이래야 논법에 맞습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논법으로는 「세존이시여! 이 실상자리라고 하는 것은 곧 실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실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해야 할 것인데, 「실상이 아니므로 이것을 실상이라고 합니다.」했으니 이 말의 조리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공부하는 사람이 구공만 지키고 앉았으면 나한(羅漢)이고 소승이 됩니다. 그래서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하는 데 범부처럼 보시한다는 생각에서 보시해도 안 되고 보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므로 그러니 무주색(無住色)하고 보시하라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적멸(寂滅) 그것 하나만 자꾸 내세우면 그 구공(具空) 그것만 지키라는 말로 돌아가게 되는 데 이 금강경에서는 구공을 체득한 사람이거나, 체득하지 못한 사람이거나, 응무소주해서 자꾸 육도만행(六度萬行)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다른 점입니다. 이런 뜻에서 이름을 실상이라고 한다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도 어긋난 것인가. 옳은 것인가. <응무소주 이생기심>에 맞는 것인가 맞추어 보십시오.

우리가 견성하기 전이라도 견성할 수 있는 발심이 잘못되면 가령 몇 천만 겁을 선방(禪房) 한 복판에 앉아 참선만 해도 그 사람이 부처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신심이 똑바로 발심(發心)되어야 합니다. 범부 때 불교를 무엇 때문에 믿는지 어느 곳으로 향해서 성불할 수 있는 것인지 발심이 바로 되어야지 그렇지 않고 사신(邪信)이 앞서 있으면 참선보다 더한 방법으로 앉아 정진해도 안 됩니다.

그래서 부처가 되고 난 그때 부처님 마음이나 부처님께서 맨 처음에 중생으로서 연등불한테 처음으로 발심한 그 때 초발심한 그 마음이나 다 무분별(無分別)입니다. 그 두 마음이 다르지 않고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처음 발심하는 마음과 마지막 성불하는 마음, 그 두 마음 가운데 처음 발심을 잘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옛글에도 「發心究竟二不別如是二心先心難(발심구경이불별여시이심선심난). 마음을 처음 낸 것과 마지막을 성취한 것과 그 둘이 다르지 않은데 이 두 마음 가운데 먼저 낸 첫 마음이 어려우니라.」라고 한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와 같이 발심(發心)을 바로 해 가지고 화두(話頭)를 잘 드는 것 그것이 수좌(首座)이고 중이지 다른 것은 중생과 똑같습니다. 술도 마시고 고기도 먹을 수 있고 남녀도 서로 알고 다른 것 똑같은데 화두(話頭) 드는 그것이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