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큰스님의 금강경

중생이 곧 부처

如明 2015. 11. 24. 04:44

중생이 곧 부처

부처님께서 도솔천(兜率天) 내원궁(內院宮)에서 인간 세상에 내려오시어 인도의 가비라왕국(迦毘羅王國) 마야부인(摩耶夫人)의 뱃속으로 들어가셨지만, 그러나 부처님은 도솔천의 법상(法床 : 설법하시는 자리)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앉아 계신 채였으며, 또한 마야부인의 태중에서 세상에 나오지 않으신 채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마치신 것입니다. 마음을 깨친 청정한 마음자리에서 보면 일체 중생이 모두 다 부처고 부처 아닌 중생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며, 자기가 깨치고 나면 본래부터 자기가 부처인 것인데, 중생이 그런 줄 모르고 육체가 <나>라고 해서 마음이 참 나인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관과 객관은 현상으로 볼 때에만 대립되어 있고 상관관계에 있는 것이지 마음의 바탕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발과 머리 사이에는 서로 거리가 있겠지만 나하고는 발이나 머리는 다 같이 거리가 없습니다.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와 몸뚱이는 어느 부분과도 거리가 없습니다. 등도 나의 등이면서 나이고 배도 앞가슴도 나의 배 나의 앞가슴이면서 그대로 나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자리에서 보면 앞도 뒤도 없고 머리가 위고 발이 아래라고 하지만 머리가 나의 위도 아니고 발 또한 나의 아래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경계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도 작을 때는 바늘 끝 위에도 올라앉을 수 있고, 또 클 때에는 온 우주를 둘러싸고도 모자람이 없기 때문에 그 크고 작은 것을 말할 수 없으며 동시에 거리나 경계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가장 자리를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그렇게 우주에 꽉 찬 것이라면 그곳을 우리가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의아심이 생길 수도 있고 마치 몸뚱이가 큰 코끼리를 보는 몸뚱이가 날렵하고 작은 원숭이가 「저렇게 큰 몸을 어떻게 움직이며 사는가.」하고 걱정하고 사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늘구멍에 실을 꿰는 경우 마음이 들어 왔다 나갔다 하는 것처럼 이 마음이 작을 때에는 바늘 끝에 올라앉을 수도 있고 클 때는 우주에 꽉 찹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커졌다 작아진 것도 아닙니다. 마음으로 바늘구멍을 들여다 볼 수도 없지만 마음이 우주에 가득 차 있는 채 그대로 보고 있는 것이며 바늘 끝에 날름 올라앉아도 오히려 넓습니다. 그러나 또한 마음이 거기 올라간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작고 크고가 자유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인간 세상을 내려오고 올라가고 하지만 실로 올라간 것도 내려온 것도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