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할 수 없는 법
그러니까 어떤 내용이 있어서 또는 어떤 모양을 쳐들어서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한 법이다 진리다.」 그렇게 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정된 법이 없는데 그렇다고 결정된 법이 없는 것으로 말하고 말면 또 그 내용이 결정됩니다. 그러니까 측량할 수 없는 불가사의(不可思議)가 그러한 실재이고 실상자리입니다.
범부가 처음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있다는데 그것을 얻어서 내가 성불해야겠구나, 견성해야 겠구나.」하는 이런 이론을 확실히 믿고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또 그런 생각 안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이론을 의지해서 그런 개념을 얻어야 비로소 성불할 수 있으니 성불할 수 있는 공부를 할 수 있고 견성을 할 수 있고 참선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역시 성불하는 마음이지 딴 마음은 아닙니다. 도둑질 하는 마음도 아니고 협잡하는 마음도 아닙니다. 성불하려는 마음이니까 그래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 아닌 것도 아니고 범부로서 마음을 낼 수도 있는 겁니다. 또 그래 가지고 견성을 할 수 있는 거니까 그것이 또 한쪽 견성(見性)이지만 보살초심(菩薩初心)까지 이룰 수 있겠다 생각하고 애를 쓰고 그렇게 견성을 합니다.
그래 가지고 사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체득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어떤 내용이냐 하고 정면으로 따져 들려면 또 범부가 처음에 이론으로 발심한 것도 딱 맞는 소리는 아닙니다. 그렇게 해 놓고도 그 발심을 가지고 근기(根氣)가 약해서 참선하다가는 미쳐 나가는 수도 있습니다. 뭐 어디 조그만 이상한 게 보이면 「아 이제 다 된 게 아니냐?」 이래가지고 방향없이 덤비는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에 근사하게 발심을 가졌지만 그게 도깨비도 되고 미친 놈도 되는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틀림없이 견성한다.」 그렇게도 못 믿어 집니다. 이를테면 배우기는 똑같은 선생한테 똑 같이 배워가지고 열이 앉아서 참선 한다고 하더라도 열이면 열이 다 같이 옳게 견성을 하느냐 하면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열이면 아홉은 견성을 하고 하나는 잘 못 되는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다음 생에 어느 때인가는 잘 못된 그 한사람도 견성해서 성불하는 날이 있겠지만, 그러나 만일 그 법이 꼭 결정된 법이라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이 다 금생에 성불해야 할 것이며 만의 하나라도 낙오자가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근기에도 달려있고 또 발심을 부족하게 한 데도 달려 있어서 그런 것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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