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큰스님의 금강경

육신 생활 떠난 보살의 세계

如明 2015. 9. 4. 07:25

[說 義]

육신 생활 떠난 보살의 세계

 

무량무변 중생을 모두 내 식구로 삼고, 이 식구를 모두 불문(佛門)에 들어오게 하여 자기자신의 인간성(人間性)을 개발해 가지고 생사를 초월하게 합니다. 이렇게 인간성(人間性)을 깨달아서 전지전능해 놓으면 아무 근심 걱정 없습니다. 내 앞에 죽은 귀신이 다 대들어도, 세계 깡패 다 모여들어도 내가 손톱 하나만 까딱하면 다 떨어지는 그런 완력(腕力)이 생깁니다. 그런 신통(神通)도 있을 뿐 아니라 지혜로도 모르는 게 없습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항상 마음 하나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하는 데서 과오(過誤)가 있고 전생(前生)이고 후생(後生)이고가 있지, 마음이 나인 줄 깨달아 놓고 나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고 이 전체가 마음 하나뿐이므로, 허공이 한없이 무한허공(無限虛空)이라고 하지만 마음한테 비하면 무한대의 허공도 역시 내 털구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적은 것에 불과합니다. 마음을 깨치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게 됩니다. 그러니 아무 근심걱정 일어날 조건이 없어지고 번뇌가 일어날 아무 이유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마음만 깨치면 의식주(衣食住)가 필요 없고 권리(權利)도 돈도 필요 없고 꼭 살아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은 죽을 수 없는 산 것이니까 영원히 자유한 것이고 그리고 남녀노소가 없는 평등한 것이니 오직 마음자리만이 전 우주에서 완전한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한 것이 <나>이거니 생각하고 우리의 육체생활(肉體生活)을 조금씩 축소시켜야 하며 하루 밥 세 그릇 가지고 세 끼 먹던 것을 두 그릇 먹고 한 그릇 남겼다가 불쌍한 사람, 거지 오면 밥 한술 더 주는 이것이 자기 육신생활 포기(抛棄)하는 것인 동시에 참 자기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차차 「한 그릇 가지고 하루 먹고 두 그릇 남 주자」 그렇게 할수록 한 그릇 먹고 사는 때가 세 그릇 먹고 사는 때보다 욕심이 없으니, 그래서 욕심이 떠나면 마음이 안정되는 것입니다. 잠 안 자도 정신이 깨끗해지고 편해집니다. 밥 세 그릇 꼭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염불이나 참선해 봐야 큰 공부 할 수 없습니다. 아침 먹고 얼마 있다가 배고프면 또 점심먹어야 하니 「이 밥 왜 안 주나. 왜 목탁(밥 먹는 신호)을 안치나」하는 생각으로 화두(話頭)고 참선이고 다 달아나 버립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나라고 하는 생각을 떼어 버리는 생활, 이런 사고방식((思考方式)으로 나아가면 차차 음식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적어지고 조금 먹어도 건강이 유지됩니다. 그러니 이것이 참 우리 생활개선(生活改善)입니다. 꼭 잘 먹어야 하는 줄 알고 영양가치 있는 것만 찾고 이런 것은 몸에 해로운 것인 줄로만 알았던 것도 마음이 편하고 나면 그렇지 않습니다. 양잿물을 먹어도 독소(毒素)가 안 됩니다. 실지로 해 본 사람은 그렇게 됩니다. 그러니 잘 먹고 못 먹는 것이 없어집니다. 「항복기심」(降伏其心)을 이런 식으로 해야 합니다. 육체 생활만 치중(置重)하는 것에서 차차 육체 생활을 감축(減縮)해가면 편안하고 잠 잘오는 음식을 조금 먹어도 몸이 건강해지고 이렇게 마음 세계로 들어가서 마음이 드러나기 시작하다가 나중에 완전히 마음을 깨쳐 불보살 지경(地境)에 들어서면 전지전능해집니다. 집도 밥도 없는 게 승려생활입니다. 남이 해 놓은 밥 얻어먹고 그저 만나는 대로 애나 어른이나 자꾸 따라다니며 <마음>을 일러주고 알아 들었으면 또 딴 사람에게 가르쳐 줍니다. 하나를 모른다면 하나를 일러 주고 누워 자도 설법해 주고 죽어 송장이 되어도 가르쳐 주고 「죽어도 네가 죽은 것이 아니다. 네가 왜 죽느냐 너는 죽을 수 없다」 우리 불교법문 전부가 이런 소립니다. 경전이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모를 뿐 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이 만일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라」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