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여읜 마음자리
육체를 나라고 해서 살기 때문에 하루 밥 세끼 먹다 시간 다 가고 바빠서 쩔쩔맵니다. 앞으로 십년 이십년 지나면 지금의 백배 천배 바빠집니다. 사람이 많아지고 전부 기계가 다하고 그때는 시간이 없어 밥도 먹을 틈이 없을 지경으로 됩니다. 지금은 태고적이 될 정도로 물질문명이 진보하여, 지나온 오천년 동안 발전한 것보다 몇 배 더한 발전을 해서 달나라 가는 것도 며칠이면 갔다 오고 화성 금성도 금방 갔다 올 겁니다. 그런 것들을 발명해 내는 마음자리, 지금 말하는 이것을 확실히 알면 그것이 곧 여래입니다. 내가 말하는 이것은 다 알아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하고 의심합니다.
즉견여래(卽見如來)를 성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예를 들어 말하자면 가령 마루 가에 내가 앉아 있는데 마당에 호랑이 한마리가 왔다고 하면 그 호랑이를 피하려고 안방으로 자꾸 뒷걸음치면서 앉은 채 미끄러져 들어갈 것입니다. 가만히 있다가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겠으니까 안방이 수백간이나 되는 큰 방이라 치고 맨 아랫목 구석까지 엉덩이를 비비면서 눈으로는 앞에 있는 호랑이를 주시하면서 문턱을 넘어 들어가서 문을 꼭 잠그고 들어갑니다. 이와 같이 호랑이를 피해서 방으로 자꾸 뒷걸음질 치듯이 마음에 모든 생각을 다 내버리고 나면 모든 생각의 주체인 이 마음자리, 기분 이전의 마음자리에 들어가 앉게 됩니다.
생각이란 생각을 다 떼어내고 객관을 세우지 않으면 고스란히 마음자리만 남는데 그 자리에만 앉아 있으면 어떤 귀신도 날 잡아가지 못하고 하느님이 와도 안 되고 부처님께서 와도 안 됩니다. 모든 생각이 떨어지고 나면 나를 볼 사람도 없습니다. 부처님도 날 못 봅니다.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신통으로도 안 보입니다. 그래서 부처님끼리는 서로 못 본다는 말(佛佛不相見)도 그런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못 보는 곳까지 가면 완전한 자기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객관을 보고 무엇을 분별하듯이 그렇게 아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안다는 소리는 안다는 말도 아니니 알아듣기 힘듭니다. 그럴 수 있겠다 짐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서남북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건이 있어서 중생들은 그것들한테 이끌리어 지배를 받고 사는데, 크고 작은 그 모든 사건을 다 버리면 마음의 본연 자세에 들어앉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들어앉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일을 한다 생각한다 하다가 생각을 내 버리면, 좋다 나쁘다 하는 기분을 내버리면, 그러고 나서 남는 것은 마음의 본연자세 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걸 여래(如來)라 그럽니다.
본심(本心)자리, 마음자리, 이것이 진짜 <나>입니다. 모든 생각의 주체인 자리입니다. 이것이 모든 조화를 부리는 것이며 온 우주에 이 <나>를 안 거칠게 하나도 없습니다. 영웅이 되든지 바보가 되든지 일체 사건의 주체입니다. 「모든 것 다 버리고 네 정신만 다소곳이 챙겨라, 거기는 호랑이도 못가고 하느님도 못가고 부처님도 못가는 마지막 자리에 도사리고 앉게 되는 자리다.」 그러면 그때에는「이제까지 쓸데없는 생각을 했구나, 엉뚱한 데 집착을 했구나」하는 것이 알아집니다. 무언가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잠재의식이 되어 가지고 마음의 본연 자세가 드러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미련만 근본적으로 끊어지면 잠재의식이 완전히 없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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