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큰스님의 금강경

原 文 : 所以者何 須菩提 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 羅蜜 是名般若波羅蜜

如明 2015. 12. 28. 08:33

原 文 : 所以者何 須菩提 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 羅蜜 是名般若波羅蜜

[解 義] 그 다음에 부처님께서 왜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지어 가지고 가지라했느냐 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반야바라밀 . 관조반야바라밀 . 실상반야바라밀의 세 가지 종류로 나누어서 이제까지 그게 실지로 말하면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설명해서 이 문자반야는 어떻고 또 관조반야는 어떻게 살피는 것이라 했지만 실은 살필 것도 없다. 마지막 자성자리인 실상반야는 어떻고 어떤것이라 설명 했지만, 또 그래서 그것을 실천해서 바라밀을 해서 부처가 되고 하는데 지혜가 제일이니까 그랬지마는 사실은 그게 반야바라밀이 아닌 것이므로 그래서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을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늘 긍정하시는 것 같으면서 부정하시고 긍정도 부정도 아닌 것으로 언제나 같은 말씀 같은 그런 내용이지만 그러나 언제나 그 말씀하시는 구절(句節)에 의지해서 그 구절은 해결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을 여지껏 고구정령(苦口丁寧)으로 이십년 동안 설명하셨는데 이제 「사실은 그게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문자나 반야에 의지해서 걸려 있지 말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보시하는 것이나 계행 가지는 것이나 인욕이나 다 잘하면 세상에 알려지고 저절로 밖으로 드러납니다. 또 정진하는 것도 모두 보고 알 수가 있고 또 선정한다고 앉아 가지고 며칠씩 먹지도 않고 하게 되므로 그것도 알 수 있습니다. 요새 미술가 들도 선정과 같은 그런 것이 있습니다. 한 일 주일씩 안 먹고 삼매(三昧)에 들어가서 구상을 합니다. 우리 한국에도 그런 굉장한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일 주일씩 어떤 땐 한 달씩 자기도 모르고 앉아서 구상하고 그럽니다. 이렇게 일종의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들어가면 자연히 지혜가 나옵니다. 이 여섯가지 바리밀 가운데 구경(究竟)에 들어가면 다 하나가 됩니다. 이금강경은 반야바라밀을 밝히는 경전이고 반야를 역설(力說)하는 경전이기 때문에 복짓는 수행도 따라오게 됩니다. 그런데 수즉파파즉수(水卽波 波卽水)로 물과 물결을 둘로 나눌 수 없는 것 처럼 복 짓는 것이나 지혜를 닦는 것은 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반야바라밀을 그렇게 애써 설명했지만 그게 반야바라밀이 아니니 그래서 금강반야바라밀이라 이름 해라.」 하신 말씀에 이해가 잘 안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뜻은 앞에서 말한 것과 역시 같은 뜻입니다. 견성하기 위해 참선한다고 벽을 향해 돌아 앉아 있지만 그것은 초학자(初學者)가 금강반야(金剛般若)를 체득해야 하겠으니 이 마음자리를 깨닫는 방법으로 하는 것이지, 실상금강이란 마음자리에서는 그것은 다 버려야 할 지식 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금강반야의 실체는 아니고 하나의 방법으로 설명하느라고 이름한 것 뿐입니다.

바라밀이다, 도피안이다, 하는 말은 생사니 번뇌니 망상이니 하는 것이 떨어져서 불생불멸하고 영원불멸하는 생명체가 온전히 티 하나 없이 드러나면 도피안이고 이것을 성불했다, 생사를 해탈했다, 그럽니다. 그때 가면 일체가 무소부지(無所不知)하고 무소불능(無所不能)한 본체의 지혜가 나타납니다. 그걸 설명하느라고 금강이니 반야바라밀이니하고 또 부인(否認)하고 그럽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마음 자체가 곧 반야바라밀이 다 되어 있습니다. 이미 말씀은 다 끝나신 것이지만 이것을 문자로 설명하면서 틀림없이 이론으로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일을 위해 「불설 반야바라밀은 곧 그것이 반야바라밀이 아니니라. 그래서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