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반야는 곧 실상반야
반야라는 말은 우리말로 눈이 보배란 말이고 소견(所見)이 있어야 한다는 말인데, 소견이란 말은 역시 지혜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도 머리를 쓸 줄 알아야 하는데, 머리를 아무리 쓰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은 탐진치(貪嗔痴) 욕심만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미친사람이 제가 미친 줄 모르듯이 욕심 때문에 어리석은 줄을 모르고 욕심을 더욱 더 부릴 따름입니다. 그러나 옳든 그르든 세상의 지혜도 반야는 반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경의 제목을 풀이할 때 반야에 대해서 자세히 말했지만 관조반야(觀照般若) . 실상반야(實相般若) . 문자반야(文字般若)를 말했는데 이 세 가지가 실상은 하나입니다. 문자반야인 이 경전이 우리가 성불할 수 있는 실상반야 . 관조반야의 조리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기록한 것이므로 이 뜻을 나중에 참말로 성취하고 보면 문자반야가 곧 실상반야고 그래서 문자가 곧 실상이고 문자가 문자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곧 마음자리입니다. 그 실상반야가 있다는 것도 문자가 소개해서 알고 관조반야를 옳게 가지는 방법도 역시문자가 지도하는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전의 문자가 역시 참으로 소중해서 이 경전이 계시는 데는 곧 부처님께서 계시는 데고, 이 경전을 설명하는 분은 곧 부처님과 같이 공경하라 하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 께서 반야바라밀이라고 늘 말씀하셨지만 그것이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래서 이 경이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말씀하셨으니, 그 말 조리가 어떤 것인지 똑 떨어져야 될 것입니다. 이것은 산 보고 높은 줄 알고 물 보고 깊은 줄 아는 목전지사(目前之事)를 설명한 것이니까 수보리를 불러서 「개미나 굼벵이를 하나 놓고 이 자체가 금강반야바라밀이니라.」한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굼벵이나 지옥 중생이나 천당 중생이나 누구든지 지도를 하면 전부 금강반야바라밀의 존재이니 이게 모두 그런 것을 설명 해놓은 말씀이고 사람이 모두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금강경 본문을 말하기 전에 이것이 지금 완전히 꿈이라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원자니 전자니 하는 것 그게 그대로가 환의 존재인데, 그렇다고 해서 과학적인 사실을 부인한 것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해서 유물론자가 인식하듯이 그런 전자냐하면 그런 것도 아니고 사실 진공이고 없는 존재고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면 유정 무정 이것도 금강반야바라밀의 존재일 따름입니다.
여기까지 하면 금강경 설명 다 된 편입니다.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을 설명한 것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반야바라밀이 아니니 그러기 때문에 이 경전의 이름을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했다.」하셨으니, 이러면 설명이 다 된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금강경 한 번 죽 들어서는 어느 대문에 어떤 내용의 골자(骨字)가 있는지 기억에 잘 안 남지만 이것을 천독 만독(千讀萬讀)을 하면 확실히 내 지식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거듭 거듭 이렇게 저렇게 말씀하시는 이것이 문자반야바라밀이고 이 문자반야바라밀이 아무것도 아니지마는 반야를 차차 자꾸 익혀서 실제로 알아지고 깨닫게 해 주는 공덕이 되기도 합니다.
혹 무한동력(無限動力)을 말하지만 아무리 물질절대론자(物質絶對論者)가 있다 해도 상대성 원리에 의해서 존재하고 절대적 존재란 하나도 없는 것이 현상계인데 무한동력도 마음 내 놓고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 이것만이 아무렇게나 해도 죽지도 않고 가만 있지도 않고 사실상 무한동력입니다. 제가 내었던 욕심을 만족하려고 할 때 가령 안 죽으려고 하는 사람의 욕심은 무한인 만큼 남이 나를 죽이려고 해서 하나가 달려들면 하나 죽이고 둘이 달려들면 둘울 죽이고 백명이 달려들면 백명을 다 죽입니다. 또 27억이 다 달려 들어도 할 수만 있으면 27억을 다 죽이고라도 나는 살아야 합니다. 마음이 악할 때는 무한히 무섭고 악하기도 하면서 또 가장 착하기도 한 존재이어서 착한 생각을 내면 이보다 더 착할 수 없는 짓을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가지고 실상(實相)이라고 하느냐 하는 것을 지금까지 부처님께서 역설하셨고, 내가 그것을 또 어떻게든지 바로 인식하도록 하려고 애를 써서 이야기했습니다. 말 하고 있는 이 자리, 말 듣고 있는 이 자리가 실상입니다. 실존철학자(實存哲學者)들이 말하고 있는 바 그 실존 자리는 산 보면 높다 하고 물 보면 깊다고 알 줄 아는 자리, 공산당은 죽일 놈들이라고 서로 적대시하는 그 자리가 실상자리입니다. 허공도 그 생각 못 내고 물질도 그 생각 못 내는 것이니 이 실상자리 빼 놓고는 그런 생각 내 놓을 곳이 없습니다. 육체도 못 내고 아무 것도 못 내는데 오직 마음자리 이것 하나만이 그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합니다. 이것은 어두운 밤에 켜 놓은 촛불처럼 항상 드러나 있고 이것은 숨을 곳도 없고 사라질 곳도 없는 아무 것도 아닌 자리입니다. 깨달아야 하겠다는 생각, 견성해야 하겠다 또 무엇을 체득해서 증득을 해야 하겠다 하는 생각 때문에 사실 막히게 되고 그게 역시 장애입니다. 이 자리는 다 드러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놈이 얘기하다가, 법문을 듣다가 깨치고 육조대사가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법문 듣고 그 자리에서 깨쳐 버리는 게 다 드러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지 그게 어디 이론으로 설명할 정도로는 그렇게 안됩니다. 그러니까 아는 것을 어디까지나 깨쳐야 하겠다는 이것이 가장 큰 근본지장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견성하기가 아주 쉽다는 겁니다. 다 드러나 있기 때문에 세수하다 코만지기보다 쉽다는 것입니다.
산 보면 높은 줄 알고 미운 것 보면 밉다고 싸우기도 하는 이것이 금강반야입니다. 또 보리심을 발해 가지고 닦는다고 하는 것이 금강의 용(用)인데, 실상이 용이고 용이 실상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깨달아 체득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개념이나마 확실히 그렇겠다고 생각해야 이것이 불교를 깨달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되고 신심(信心)이 튼튼해집니다. 범부로서 일으키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곧 자성(自性)에 대해 그 존재가 어떤 거라고 개념으로나마 깨치기 전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부처님께서 설명을 자주 해 주십니다. 그렇지만 사실 부처님께서 애써서 소개하시고 싶은 것은 말 듣는 그 자리, 일체 시비언설(是非言說)이 다 끊어져서 이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동시에 곧 이것이 없는 거로 있는 거고 있는 것으로 없는 그 자리입니다. 그러니 논리를 초월한 자리이지만 부득이 억지로 말을 붙여서 금강반야바라밀이라 한 것이므로 실상은 금강반야바라밀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소개하고 싶어하는 그 내용은 문자도 아니고 그러면서 역시 마음에서 나온 겁니다. 마치 「바람이 움직인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인 것도 아니고 전체가 그대들 마음이라.」고 하신 육조대사의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반야바라밀이라고 임시로 이름을 만들었지, 그 자체가 어디 이름을 가졌느냐는 것입니다. 깨치기 전에 아무리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그런 무슨 객관적인 진리가 있는 것 같이 인식을 하고 그러지만 그 실상과는 멀리 어그러집니다. 그 실상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런 내용을 가진 것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름을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붙이라고 하는 것이니 실지는 금강반야바라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놈은 이름도 아니고 우리가 그런 얘기 듣고 추상(推想)할 수 있는 그런 내용도 아니고 생각조차도 아니란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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